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북 리뷰

[걸리버 여행기]는 동화가 아니다

반응형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1726년

지금 이 시간에도 소인국 이야기, 대인국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을 어린이들에게는 참 뜬금없는 얘기로 들릴 것 같다. 아니 [걸리버 여행기]라는 동화 속 세상에서 꿈의 나래를 펼치고 있을 꼬마 독자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사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육지에서 한참 떨어진 섬에 살았던 나도 학교 건물 한귀퉁에 자리잡은 조그마한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꺼내 읽었던 동화가 [걸리버 여행기]였던 것 같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니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한참 동안 [걸리버 여행기]는 동화 속 이야기로 나의 뇌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책 꽤나 읽었다고 자부했지만 얇디얇은 내 지식의 한계를 여지없이 까발려준 책이 [걸리버 여행기]다. 불과 10년 전의 일이었다. '킬링 타임'으로 서점에 들렀는데 어린이 서적 코너에 있을거라 생각했던 [걸리버 여행기]가 문학 코너에 꽂혀 있는 걸 보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집어본 게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걸리버 여행기]는 어느덧 늘 곁에 두고 생각나면 읽어보는 애독서가 되었다. 재미와 감동 자기성찰의 기회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들곤 한다.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의 [걸리버 여행기]는 출간 당시 금서목록에 분류되었다. 적나라한 사회 비판과 풍자로 인해 당시 권력자들과 비평가들의 심기를 건드린 탓이었다. 그렇다보니 껄끄러운 내용들은 다 삭제되고 소인국과 대인국 이야기만 남은 동화가 돼버린 것이다. 물론 소인국, 대인국 이야기마저도 인간사회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비껴가지는 못한다.

 

스위프트 자신도 이 책을 "세상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나게 만들려고 쓴 책"이라고 했다니 검열제도만 없었더라면 더욱더 날선 사회 비판서가 되었을 것이다. 여행을 마친 걸리버는 마지막 장에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나는 16년 7개월 동안의 여행을 독자들에게 들려 주었고 실제 있었던 일들만 이야기했다. 나의 목적은 여행기를 읽는 독자들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그러나 여행가의 중요한 목표는 다른 나라에 대한 정보를 알려서 사람들을 깨닫게 하거나 정신을 계발하는 데 두어야 하는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는 총 4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작은 사람들의 나라(원제: A Voyage to Liliput)

제2부: 큰 사람들 나라(원제: A Voyage to Brobdingnag)

제3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원제: A Voyage to Laputa, Balnibarbi, Luggnagg, Glubdibdrib, and Japan)

제4부: 말들의 나라(원제: A Voyage to country of the Houyhnhnm)

 

스위프트는 걸리버의 첫 여행지인 작은 사람들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원인을 보면서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반목과 갈등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에서 비롯되는지를 보여준다. 그 전쟁의 원인은 다름아닌 계란을 깨는 방법이었다. 이런 인간사회의 이전투구는 큰 사람들 나라에서는 하찮은 벌레들의 그것으로 격하되고 만다.

걸리버가 세번째로 찾은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연상케 한다. 수학과 물리에 능통한 이 나라 사람들은 세상을 재단하는 기준이라곤 수학과 물리밖에 없다. 스위프트는 급속한 사회변혁을 겪으면서 오만해진 인간사회에 일침을 가한다. 여기서 잠깐 상식 하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제목도 여기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스위프트의 통렬한 풍자는 마지막 4부에서 클라이막스에 치닫게 된다.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고 만다. 고귀한 존재인 휴이넘은 말이다. 그러나 인간인 야후는 더럽고 야만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니 휴이넘이 야후들을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마도 당시 비평가들은 안그래도 심드렁해졌던 참인데 이 부분에서 [걸리버 여행기]를 난도질해야겠다는 생각했을 것이다.

걸리버가 뜻하지 않게 겅험했던 여행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그러나 [걸리버 여행기]를 읽는 독자들의 여행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부터 시작될 게 분명하다. 긴 여운이 온몸에 전율처럼 흐를지도 모른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한가?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이성을 가졌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휴이넘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걸리버 여행기]를 읽고 또 읽다보면 나와 우리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