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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그리스

하데스와 플루토스 그리고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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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신 하데스. 출처>구글 검색

제우스가 올림포스 신 중의 신이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신이 아니었다. 제우스에게도 엄연한 가족이 있었다. 크로노스와  레아라는 올림포스 이전 시대의 부모가 있었고 죽음의 신 하데스와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는 형제지간이었고 가정의 신 헤스티아, 곡물의 신 데메테르, 결혼과 출산의 신 헤라와는 남매지간이었다. 출생 순서로 따지면 하데스, 포세이돈,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 제우스 이렇게 육남매였다. 하지만 막내 제우스가 올림포스의 지배자가 된 데는 아버지 크로노스의 엽기적인 행각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크로노스는 시간과 세월을 관장하는 신으로 알려졌다. 시간과 세월의 특징이무엇인가?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는 것이다. 크로노스가 그랬다. 그는 자식들이 태어나는 족족 삼켜버렸다. 하데스, 포세이돈, 헤스티아, 데메테르, 헤라가 그런 운명이었다. 레아는 남편 크로노스의 이런 엽기적 행각을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도움을 받은 레아는 제우스가 태어나자 재빨리 산속 요정들에게 맡기고 바윗덩어리 하나를 보자기에 싸서 갓 태어난 아기인 것처럼 위장했다. 크로노스는 어김없이 그 바윗덩어리를 제우스로 착각하고 삼켰던 것이다. 그렇게 목숨을 구한 제우스는 훗날 청년이 되어 아버지 크로노스가 삼켜버린 형제와 남매를 구하게 되는데 신들이 먹는 음식인 암브로시아와 술인 넥타르에 토제를 넣어 크로노스에게 먹여 토하게 했다. 크로노스는 삼켜버렸던 자식들을 다 토해내기 시작했는데 삼킨 반대순서였다. 결국 애초에 막내로 태어났던 제우스는 이미 장성해 육남매 중 맏이가 되었고 장남이었던 하데스는 크로노스가 맨 나중에 토해내서 막내가 되었다.  

 

하데스는 저승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특히 하데스는 지상으로 올라올 때면 ‘퀴네에’라는 투구를 쓰고 다니는데 이 투구를 쓰면 신이나 인간의 눈에 띄지 않게 된다. 일종의 투명인간이 되는 것이다. 1895년 <타임머신>이라는 소설로 ‘과학소설의 창시자’라는 격찬을 받은 영국의 소설가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 1866~1946년)가 1898년에 발표한 소설 <투명인간>도 그리스 신화 속 하데스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을 발명한 가난한 과학자 그리핀에게는 이 불가시성이 힘과 자유였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공포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자유 대신 타인의 공포에 희열을 느낀 투명인간 그리핀은 하나의 거대한 악이 되고 만다. ‘투명’이라는 불가시성은 소통하지 못한 사회와 인간의 주체이자 객체이기 때문이다. 하데스가 관장하는 지옥처럼 말이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불타는 발전소. 출처>구글 검색

하데스 옆에는 늘 저승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가 있다. ‘퀴네에’와 함께 하데스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드는 소품(?)이다. 그렇다면 이런 무시무시한 하데스는 혼자 살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데스의 아내가 된다는 것은 음산한 지하의 세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고 특히 하데스가 지배하는 세상은 살아서는 들어갈 수 없는 지하, 지옥, 죽음의 공간인데 누가 그와 감히 그와 결혼할 엄두를 내겠느냐 말이다. 하데스는 어쩔 수 없이 지상의 여신을 납치하기도 마음 먹는다. 바로 페르세포네였다.

 

하지만 신화의 세계는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온통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누이인 곡물의 신 데메테르의 딸이다. 게다가 페르세포네의 아버지는 데메테르의 아버지인 제우스다. 즉 하데스의 아내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조카이자 이복동생인 셈이다. 무슨 이런 개족보가 있나 싶겠지만 신화의 세계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다.  

 

살펴본 바 죽음, 지옥, 지하, 공포로 상징되는 하데스를 고대 그리스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부르기란 그리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하데스를 다른 이름으로도 불렀고 하데스처럼 지하에 살지만 전혀 다른 의미의 상징이 되었다. 바로 플루토스다. 즉 플루토스는 하데스의 별칭인 것이다. 하지만 고대인들이 하데스를 무시무시한 죽음과 공포의 신으로 여겼던 것과는 달리 플루토스는 지하에 묻힌 모든 자원의 주인이었다. 또 곡식의 생산을 도와주는 대지의 신이기도 했다. 원자번호 94번의 원소 플루토늄(Plutonium)은 바로 하데스의 또 다른 이름 플루토스에서 비롯되었다. 즉 ‘플루토스의 광물’이 플루토늄인 것이다. 사실은 플루토늄의 어원을 설명하기 위해 죽음의 신 하데스가 대지의 신 플루토스가 되기까지를 장황하게 설명했던 것이다.

 

플루토늄은 우라늄광에서 극히 미량으로 존재하는 원소로 핵 폭탄의 원료나 원자력 발전의 연료가 되기도 한다. 1945년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도 플루토늄에서 비롯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관계의 이면에도 이 플루토늄이 자리잡고 있다. 북한의 경수로 원전을 둘러싼 주변 6개국의 논란도 핵무기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한 의도 때문이었다. 또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누출이 원전의 실효성에 관한 논란이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결국 많은 국가들이 원전 폐기를 추진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만은 오히려 원전폐기가 진영 논리의 장이 되어 그 위험성이나 실효성에 대한 논쟁은 온데간데 없게 되었다.  

 

어쨌든 20세기 들어 가장 유용한 광물로 각광받아온 원소가 플루토늄이고 이를 원료로 한 원전이 가져다 준 효과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지만 그만큼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도 짧은 역사지만 수없이 많이 봐왔다. 여기서 플루토늄의 어원이 된 대지의 신 플루토스의 또 다른 이름이 죽음의 신 하데스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겹지만 신화는 상징이다. 신화에 상징이 없다면 신화를 읽는 이유조차 불분명해질 수도 있다.

 

20세기의 위대한 광물이라는 플루토늄의 두 얼굴은 하데스와 플루토스다. 즉 죽음과 풍요다. 사실 따진다면 플루토늄의 짧은 이용 역사에서 오로지 풍요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늘 원자폭탄이나 핵무기, 원전사고라는 죽음이 공존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에너지 개발이 현실화될만큼 과학기술이 발달한 이 시점에서 굳이 플루토늄의 두 얼굴인 하데스와 플루토스를 고집할 어떤 이유도 명분도 없다. 원전 폐기라는 전세계적인 흐름은 미래를 위한 과감하고 현명한 선택이다. 진영 논리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에서 가장 직시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국민의 안전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또 안전은 지금  세대가 미래 세대에 물려줄 가장 큰 유산이다. 우리에게도 일상이 되어버린 지진. 안전이 진보, 보수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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