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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인간성 상실의 막장 드라마, 낙인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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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처럼 '낙인찍기'가 성행하고 위력을 발휘하는 국가가 있을까 싶다.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체제가 해체된지 20년이 되어가지만 '좌파', '좌빨'이라는 낙인찍기는 여전히 정치적인 파괴력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다. 특정지역에 대한 조장된 이미지를 활용한 지역감정 조장도 낙인찍기의 또다른 형태로 볼 수 있다.

낙인찍기는 집단린치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낙인찍기의 심각성은 단순히 개인 대 개인, 집단 대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이기 전에 권력과 언론이 부추기고 조장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작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사건에서 권력과 언론이 자행했던 낙인찍기의 몰인간성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낙인찍기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미국 유명 소설가, [큰바위 얼굴]의 저자,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 지은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에서 비롯된 게 낙인찍기다. 낙인찍기란 개인과 집단에 강제로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이다. 이 주홍글씨는 어지간해서는 지워지지 않고 평생 개인과 집단을 괴롭히는 악마와도 같다.

영국에서 건너온 헤스터 프린은 불륜의 댓가로 가슴에 'A'(Adultery)자가 새겨진 주홍글씨를 다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헤스터 프린이 공개된 주홍글씨를 새기고 살아간다면 [주홍글씨]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은 마음 속에 주홍글씨를 새기고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으며 끝내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헤스터 프린의 불륜 상대였던 딤즈데일 목사,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고는 지나친 복수심에 조금씩 조금씩 생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칠링워드,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딤즈데일 목사가 죽기 전 참회를 통해 그동안 가슴 속에 달고 살았던 주홍글씨를 털어낸 반면 칠링워드는 딤즈데일 목사에 대한 복수심을 거두지 못하고 그가 죽자 복수 상대가 없어진 허탈감에 끝내 주홍글씨를 지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주홍글씨 'A'는 Adultery가 아니라 Angel이었다.

또 한 명의 주홍글씨를 새기고 사는 인물이 있다. 바로 헤스터 프린과 딤즈데일 목사의 불륜으로 태어난 펄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쩌면 평생을 불륜의 씨앗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갈지도 모를 펄이었다. 그러나 펄이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부모 세대의 낙인찍기가 마감되는 상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주홍글씨가 세습되지 않을 희망을 보여준다고 해야 적절할 것 같다.

아버지 딤즈데일의 참회와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을 불행한 여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며 생을 마감한 어머니 헤스터 프린 때문이다. 헤스터 프린은 그녀의 가슴에 평생 새겨진 주홍글씨 'A(Adultery)'를 'A(Angel)'로 바꿔놓았던 것이다.

개인과 집단에 새기는 주홍글씨, 낙인찍기는 인간성 상실의 막장 드라마다. 그러나 조장된 주홍글씨는 당한 이의 가슴에만 새겨지는 건 아니다. 낙인찍기를 조장한 개인이나 집단도 그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보이지 않는 주홍글씨를 아로새기고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칠링워드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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