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화와 전설/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최고신 마르둑과 가부장적 질서의 시작

반응형

가장 먼저 기록된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하구를 중심으로 페르시아 만의 북쪽 끝에 정착했는데 두 강의 하구를 중심으로 펼쳐진 비옥한 토사는 농사에 적격이었다. 그들이 바로 수메르인으로 알려졌으며 세계에게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개척했다. 비록 수메르인들이 북쪽에 메소포타미아 북쪽에 살았던 아카드의 셈족과 인종적으로 달랐다는 증거는 없지만 그들의 언어는 셈족어가 아니었다. 수메르인들은 그들 다음으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지배했던 바빌로니아인들과 아시리아인들 신화의 근원이었다.

 

담수의 여신 티아마트를 쫓고 있는 마르둑. 출처>구글 검색


수메르인들은 계급과 성격이 다른 수많은 신들 즉 위대한 판테온을 숭배했다. 그들이 숭배했던 가장 중요한 네 명의 신은 하늘의 신 안(An), 땅의 신 키(Ki), 대기의 신 엔릴(Enlil), 물의 신 엔키(Enki)였다. 이 신들은 또한 훗날 수메르인의 북쪽에서 번성한 문명을 개척했던 바빌로니아인들에게도 숭배되었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1900년 경부터 기원전 550년 경으로 추정된다. 바빌로니아인들은 이름만 바꾼 채 수메르 신들의 특징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안은 아누(Anu)로, 엔키는 에아(Ea)라는 이름으로 숭배되었다. 하지만 마르둑(Marduk)만은 수메르 판테온에서 특별히 중요한 신이 아니었다. 그는 바빌로니아 시대에야 두각을 나타낸 신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마르둑(Marduk)은 바빌론의 창조신이자 국가신이었다. 마르둑 숭배는 기원전 18세기 경 함무라비(Hammurabi) 왕 통치 기간에 매우 중요한 국가적 행사가 되었다. 에아와 담키나(Damkina)의 아들인 마르둑은 보통 머리에서 불을 뿜는 거인으로 묘사된다. 마르둑은 원시 시대의 용으로 알려진 염수의 여신 티아마트(Tiamat)와 싸우기 위해 다른 신들에 의해 보내졌다. 티아마트를 죽인 후 마르둑은 그녀의 몸으로 땅과 바다와 하늘을 창조했다. 또 티아마트의 시종인 킨구(Kingu)로 인간을 창조한 후 신들의 왕 즉 바빌로니아 판테온의 최고신이 되었다.

이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는 옛 여신 시대의 종말과 함께 서아시아의 가부장적 질서의 시작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의 전환은 기원전 5000년에서 기원전 3000년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마르둑의 여성성의 용인 티아마트와의 전투는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의 전환을 극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티아마트는 대지와 바다의 어머니였던 남마(Namma) 즉 수메르의 바다 또는 물의 여신들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다. 티아마트의 눈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었다. 마르둑이 티아마트를 물리쳤을 때 그는 나무와 땅, 갈대 구조물, 성지, 벽돌, 도시, 댐 등을 힘겹게 지었다. 그는 두 강의 성장하는 삼각주의 충적토에 문명을 세웠다. 이것은 바빌로니아에서 강의 중요성을 반영한다.

마르둑과 티아마트 이야기는 바빌로니아의 창조 서사시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나온다. 오늘날 존재하는 버전은 기원전 1150년 경에 기록되었지만 그 내용은 기원전 1900년 이전 버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서 많은 신화적 모티브들이 시작되었는데 가나안(또는 우가리트) 신화의 바알(Baal)도 이 신화에서 차용되었다.

에누마 엘리쉬에 따르면 태초에는 담수의 신인 압주(Abzu)와 염수의 신인 티아마트(Tiamat) 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의 신들이 탄생한 것은 바로 이 물이었다. 신들은 에너지와 활동성을 대표했다. 하지만 압주와 티아마트는 고요함과 평온함을 상징했기 때문에 그들과 신들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감돌았다. 신들이 춤을 추자 압주와 티아마트는 대혼란에 빠졌다. 결국 압주는 신들을 죽이기로 결심했으나 티아마트는 모성 본능의 발현 때문인지 그들의 자식들인 신들을 파멸시키는 데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압주는 시종인 뭄무(Mummu)의 도움을 받아 신들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신들 가운데 막내인 엔키가 이 음모를 미리 알고 압주를 죽이고 그 위에 성전을 세웠다. 엔키는 뭄무를 포로로 잡았다.

엔키가 압주를 죽이고 세운 그 신전에서 에누마 엘리쉬의 영웅 마르둑이 태어났다. 마르둑은 네 개의 눈과 네 개의 귀를 가지고 있었으며 누구보다 멀리까지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불이 뿜어져 나왔고 그의 키는 다른 어떤 신들보다 더 컸다. 마르둑이 어렸을 때 네 가지 바람을 가지고 놀았는데 그 바람은 하늘의 신이자 마르둑의 할아버지인 아누(Anu)에게서 받은 선물이었다. 마르둑이 바람을 가지고 놀 때마다 신들은 혼란스러웠다. 결국 그 동안 모성으로 참고 있었던 티아마트가 나섰다. 티아마트는 킨구를 선봉으로 각종 괴물들로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다. 티아마트는 킨구에게 ‘운명의 서판’을 맡겼다. 운명의 서판은 율법과 예언이 새겨진 석판으로 바빌로니아 신화에서는 특히 신들의 권력 구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아와 아누는 전쟁을 막기 위해 중재를 시도했지만 티아마트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갈등이 불가피해진 가운데 지평선의 신이자 신들의 왕인 안샤르(Anshar)는 마르둑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마르둑은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는 조건으로 동의했다. 모든 신들의 회의에서 그에게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자 마르둑은 모든 별자리를 파괴한 다음 즉시 온전하게 다시 배치함으로써 그의 새로운 힘을 시험했다. 간단한(?) 시험이 끝난 후 마르둑은 메소포타미아 전사들의 평상시 무기뿐만 아니라 비와 홍수로 무장했다. 폭풍과의 연관성은 그를 번개를 소유한 제우스와 인드라와 같은 인도유럽계 신들과 연결시킨다. 따라서 마르둑은 땅의 질서를 위협하는 담수의 여신과 전투를 벌인 하늘의 신이었다. 마르둑은 티아마트가 아누의 권위를 남용했다고 비난했다.

 

바빌로니아 신년 축제 아키투(Akitu)의 재현 모습. 출처>구글 검색


마르둑이 전투에 참여하자마자 티아마트의 군대는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직 티아마트만이 물러서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지금은 용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에누마 엘리쉬에에는 티아마트가 두 다리로 걸었다는 묘사가 있는 걸로 봐서 마르둑과의 전투 당시 티아마트는 용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티아마트의 이미지는 나중에 더해진 것으로 보인다. 새롭고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에 놀란 티아마트는 아첨으로 마르둑을 무장해제하려 했지만 마르둑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몸을 부풀려 죽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의 입 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몸이 부풀어 올랐을 때 화살을 쏘아 죽였다. 마르둑은 티아마트의 두개골을 부수고 동맥을 찢고 나서 시체를 둘로 분리했다.

마르둑은 티아마트 시체의 절반으로 대지와 강과 산을 만들었다. 나머지 반으로는 하늘을 만들고 별과 달과 해의 움직임을 설정했다. 마르둑은 새로운 세계의 관리를 에아에게 맡겼다. 또 킨구가 가지고 있던 운명의 서판은 아누에게 주었다. 그 자신은 바빌론이라는 새 도시를 세웠는데 그 때 그와 싸웠던 괴물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마르둑은 포로로 잡았던 티아마트의 시종 킨구를 모든 전쟁의 책임을 지워 처형하고 그가 흘린 피로 최초의 인간을 만들었다.

마르둑은 신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하늘을 다른 하나는 대지를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신들은 감사의 표시로 마르둑이 바빌론을 건설하는 것을 도왔다. 그들의 가장 큰 업적은 마르둑의 성전인 에사길라(Esagila) 신전이었다. 신전이 완성되지 신들은 그곳에서 회의를 열고 그들 중 7명을 운명의 신으로 선출했다. 마침내 마르둑은 그의 아내 자르파니트(Zarpanit)와 함께 왕좌에 올랐다. 신들은 마르둑 앞에 엎드려서 영원한 충성을 맹세했고 마르둑은 50명의 신들의 이름을 엄숙하게 호명했다.

드디어 마르둑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신들에 의해 지배되는 안전한 사회를 구축했다. 그는 다른 신들을 흡수하여 신들의 왕뿐만 아니라 운명과 우주와 인류의 창조자가 되었다. 마르둑은 창조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인들의 운명의 결정자이기도 했다. 바빌론의 인간 왕들은 마르둑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새해 아키투(Akitu) 축제를 개최했다. 아키투는 기원전 200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아키투 신년 축제는 페르시아 통치 시절에도 페르시아 왕의 주도로 개최되었다고 한다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