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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와 전설/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의 난봉꾼, 엔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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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주인’을 의미하는 수메르의 신 엔키(Enki)는 바빌로니아와 아카드 신화에서는 에아(Ea)로 불렸다. 물의 신이자 지혜의 신 엔키는 하늘의 신 안(아누), 바람과 대기의 신 엔릴(엘릴)과 함께 메소포타미아 판테온의 삼주신 중 하나다. 엄청난 성욕이 그의 도덕적 관습을 의문으로 이끌기는 했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의 욕정에 가득 찬 일탈은 그의 인간에 대한 바람과 분쟁을 일으키기 보다는 해결을 지향하는 경향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 보인 호의로 인해 일정부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깨에 물줄기를 달고 있는 신이 바로 물의 신이자 지혜의 신 엔키. 출처>구글 검색

엔키는 원래 에리두의 수호신이었다. 고대 수메르 종교에 따르면 에리두는 창조된 첫 번째 도시였다. 엔키는 기원전 2600년~2350년경에 처음으로 아카드 신으로 언급되지만 엔키 신전은 기원전 5400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100년경으로 추정되는 바빌론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 따르면 우주는 원래 혼돈 상태였다. 혼돈은 담수이자 남성적 원리인 압수(Apsu)와 여성적 원리의 염수인 티아마트(Tiamat)로 분리되었다. 압수와 티아마트는 최초의 신으로 엔키는 이들의 큰 아들이었다.

엔키는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지혜를 이용해 최선의 해결책을 찾는 사랑스러운 신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엔키는 싸움꾼이 아닌 첫 번째 사랑꾼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카드/바빌론 신화에 따르면 창조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젊은 신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신들은 고된 일상의 반복에 짜증이 났다. 결국 최초의 신들은 젊은 신들을 대신해 인간을 창조했다. 처음에 신들은 각각 일곱 명의 남자와 여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생산력으로 인간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인간의 수가 늘어날수록 세상은 시끄러워졌다. 이런 인간들에게 신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들은 인간을 멸망시키기 위해 바람과 대기의 신 엔릴(Enlil, 바빌론의 엘릴)을 보냈다. 엔릴은 가뭄과 전염병으로 인간을 멸망시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엔키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갔다.

엔릴이 다시 대홍수를 인간세상에 보내기로 결정했을 때 엔키는 다시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한 인간만은 다가올 재앙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했다. 엔키는 자신이 정한 그 인간에게 전령을 보내 배를 만들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 인간이 바로 아트라하시스(Atrahasis)였다. 아트라하시스는 엔키의 조언대로 거대한 배를 만들어 동물들을 실었다. 하트라하시스는 대홍수때 살아남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엔키의 신전이 있었던 수메르의 고대도시 에리두 상상도. 출처>구글 검색


또 다시 엔키의 방해로 인간을 벌주기 위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엔릴은 엔키에 대한 적개심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엔키는 자신이 도운 인간이 동료 인간들 때문에 대신 벌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매우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며 엔릴을 설득했다. 대홍수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간 아트라하시스가 신들에게 재물을 바쳤을 때 신들은 비로소 화가 풀렸다. 하지만 엔릴은 아니었다. 엔릴은 엔키가 인간들은 신들처럼 불멸의 생을 살 수 없으며 여자들도 신들처럼 무한한 생식능력을 가질 수 없다고 선언했을 때 비로소 분노를 내려놓았다.

엔키와 풍요와 미의 여신 인안나(Inanna) 신화에서 엔키는 메(Meh)라고 불리는 문명을 만드는 사회 제도, 종교적 관행, 기술, 행동, 관습 및 인간 조건의 기초가 되는 신의 법령의 소유자였다. 신들의 연회에서 엔키는 자신의 딸인 인안나를 술에 취하게 해 유혹하려 했다. 하지만 인안나는 엔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일부러 술을 피했다. 오히려 엔키가 술에 취하고 말았고 술김에 엔키는 메를 인안나에게 선물했다.

엔키는 아침이 되어 술이 깨고 나서야 메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엔키는 메를 되찾기 위해 인안나에게 괴물들을 보냈다. 하지만 인안나는 괴물들을 간신히 따돌리고 달아났다. 엔키는 인안나가 인간에게 문명의 선물을 줄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인간의 필요를 생각하고 있었다.

엔키와 대지의 모신이자 풍요의 여신이었던 닌후르사그(Ninhursag) 사이에는 네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마르둑(Marduk), 엔빌룰루(Enbilulu), 아사르루히(Asarluhi), 아다파(Adapa)가 바로 그들이었다. 정액의 신이기도 했던 엔키는 수많은 근친상간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성욕 때문이었다. 엔키와 닌후르사그 사이에는 닌사르(Ninsar, 새싹의 여신)라고 부르는 딸이 있었는데 태어난 지 불과 9일만에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아내가 없는 동안 엔키는 닌사르를 유혹해 닌쿠라(Ninkurra, 산의 여신)라는 딸을 낳았다. 닌쿠라도 닌사르처럼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인으로 성장했다. 엔키는 닌쿠라마저 유혹해 웃투(Uttu, 피륙의 여신)라는 딸을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닌후르사그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닌후르사그는 남편 엔키를 저주했고 그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가 엔키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여덟 명의 자식들을 더 낳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태어난 자식들이 난쉐(Nanse), 아부(Abu), 닌시투(Ninsitu), 닌툴라(Nintulla), 아지무아(Azimua), 닌카시(Ninkasi), 닌티(Ninti), 엠샤그(Emshag)였다.

엔키는 긴 예복을 입고 뿔 달린 모자를 쓴 수염을 기른 남자로 묘사된다. 그의 어깨에는 물고기가 들어있는 물줄기가 흘러나와 물과의 연관성과 생명력을 상징한다. 엔키의 어깨에 나타난 물줄기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에서 발원했다. 엔키 묘사에 등장하는 나무들은 자연의 남녀 원리를 상징한다고 한다.

에리두에서 엔키의 신전이 발견되었지만 실제 엔키 숭배는 아시리아에서 바빌로니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에리두에 있는 엔키 신전은 ‘지하수의 집’이란 뜻의 에-엔구라(E-engurra)와 ‘압주의 집’이란 의미의 에-압주(E-abzu)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엔키 신전에서는 어떤 의식도 열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치유의 장소이기도 했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에리두는 구약성서의 에덴 동산과 유사한 개념이었다.

엔키 신화에서 닌후르사그는 그 당시의 가부장제 사회의 양성 평등을 반영하여 엔키와 동등하게 묘사되었다. 나중에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는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사회가 정착되면서 수메르보다는 더 낮은 신으로 강등되었다. 지혜의 신이자 물의 신이었던 엔키는 근동의 문화와 종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 사원이나 기독교 신전에서 발견되는 신성한 분수는 엔키 신전 밖에 있는 담수 저장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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