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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70주년에 읽는 詩 '화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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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생존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 제주도민 여러분. 돌담 하나,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통곡의 세월을 간직한 제주에서 "이 땅에 봄은 있느냐?" 여러분은 70년 동안 물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 중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제 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한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현직 대통령으로는 두 번째로 4.3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복권을 선언했다. 아픈 역사, 굴곡된 역사를 끊는데 70년. 사람이 나서 죽을 시간만큼의 세월 동안 아픈 역사를 치유해 주려는 지도자가 부재했다는 사실이 더 마음이 아픈 오늘이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사랑이 부재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슬퍼할 줄도 그 슬픔을 치유해줄 의지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슬픔의 출처는 사랑이다/사랑이 형체를 잃어가는 꼭 그만큼 슬픔이 생겨난다/사랑이 완전히 사라지면 슬픔은 완벽하게 나타난다/화산도의 봄날 어디서라도 증명사진처럼 볼 수 있다


사랑을 잃은 유채꽃은 불게 피어선 진다/어떤 사랑은 이별할 시간도 없이 한 구덩이에 묻혔다/사랑을 잃은 동백꽃은 잎이 없는 가지에서 피어선 진다/어떤 사랑은 죽음으로써 아이를 살려 품은 품 안에서 이별했다



화산도는 땅과 바다가 단 한번 사랑으로 피었다가/아직 꽃잎 지는 중이다 오래도록 꽃잎 지는/이 섬에서는 사람의 사랑도 한번 지면/오래오래 앓으면서 꽃잎 지는 현재진행형이 된다


어떤 꽃잎은 일흔번의 봄을 갈아엎고도/여태 사랑을 잃은 꽃잎으로 지고 있다/갈질 수 없는 섬 흩어질 수 없는 섬/갈라서지 말자고 흩트리지 말자고 가슴을 내걸었다가/사랑을 잃은 영혼들이 저렇듯 온통 꽃잎으로 지는 중이다


모든 슬픔의 출처는 사랑이다. 슬픔을 되돌려/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된 땅에 꽃잎 지고 싶은 원혼들이/여태 떠돌며 난분분 지는 중이다. 그렇다고/다만 무작정 지는 것만은 아니다. 자세히 보면/예토를 되돌려 노란 꽃은 노랗게 붉은 꽃은 붉게 필/그날의 대지 위로 꽃잎 나부끼며 여태, 아직 지는 중이다


머지않아 사뿐히도 내려앉아/온 섬을 뒤덮고야 말 꽃잎, 꽃잎들/세상 모든 슬픔의 환지본처 사랑에게로 목하 지는 중이다/맑은 땅에 닿을 날 실로 머지 않았다 -안상학의 '화산도(4·3 일흔번째 봄날)'. 출처: 창작과 비평 2018년 봄호 -


그런데 아직도 오늘을 '좌익폭동 세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을 추념하는 날이라며 이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도 있다. 뻔뻔하게 추념식 맨 앞자리에 앉아서 말이다. 그 가식 요즘말로 '쩐다'. 사람을 사랑할 줄도 그래서 진정으로 슬퍼할 줄도 모르는 이가 한 나라의 지도자를 꿈꾸고 있는 세상이다. 이 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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