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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해리를 막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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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의 첫인상은 마치 동화 속 귀공자를 보는 듯 했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 조막만한 얼굴, 잡티 하나 없이 뽀얀 피부, 갸날프게 빠진 턱선, 안경 너머로 보이는 초롱초롱한 눈...평생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부잣집 막내 아들 같던 해리가 이런 막일을 한다고 왔을 때 긴가민가했습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해리는 똑부러지는 아이었습니다. 아니 21세기 대한민국을 사는 당당한 대학 새내기 청년이었습니다.

참, 해리가 본명은 아닙니다. 영화 속 '해리포터'를 닯아 우리는 그냥 '해리'라고 불렀습니다.

해리는 붙임성도 있어 거의 아버지, 삼촌뻘 되는 우리에게 '형, 형'하며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이런 막일과 어울리지 않는 외모탓이었는지 늘 힘겨워 보였지만 전에도 이런 일 많이 해봤다며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친구였습니다.

그런 해리가 어제 이별통보(?)를 했습니다. 아니 다음주부터 해리를 보지 못합니다.

어제밤은 새까만 하늘에선 가끔씩 섬광이 빛을 내뿜고 마지막 장마비가 애달프게 내리고 있었습니다. 해리는 다른 일을 하겠다며 형들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도 할겸 해서 출근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막일하는 일터에서 사람 들오고 나가는 일이 일상적이긴 했지만 해리는 조금 특별했습니다.

 

해리는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유학생입니다. 방학인데도 집에 가지 않고 고시텔에서 생활하면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탓에 학자금 대출로 등록금을 마련하고 매월 대출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입학 이후 줄곧 아르바이트를 있습니다. 물론 생활비도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멋진 놈입니다.

갑작스런 통보에 다들 섭섭해 하고 있는데 새로 들어갈 직장이 술집이랍니다. 그것도 여성전용 바. 다행히 미성년자는 아니더군요. 해리의 짧은 통보는 우리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해리가 처음으로 겪은 사회에 대한 외침으로 들렸습니다. 일한 만큼의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약속한 최소한의 대우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추가적인 업무만 강요하는 회사가 싫답니다. 여기 뿐만 아니라 전에 일했던 직장에서도 들어갈 때 약속이 지켜진 곳이 하나도 없었답니다. 아마 아르바이트라 더 심했을 겁니다. 다시는 그런 데서 일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는데 그래도 거기는 일한 만큼의 대우는 받는다고 말합니다. 아무래도 해리는 전에도 술집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모양입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내가 다니는 직장은 과도한 업무에 그것도 국가가 지정한 공휴일까지 일하면서 제대로 된 임금도 지급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묵묵부답 일만 하고 있습니다. 법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나마 여기 아니면 다른 직장 구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더 솔직히 얘기하면 이런 모순에 스스로 동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순을 깨기 위한 행동이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던 커다란 장벽에 막히면서 차라리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선택하고 맙니다. 그러는 사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뒤로 굴러가고 있다는 현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리 눈에는 그런 우리가 한심해 보였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부모님 세대에게 듣던 말로 해리를 설득해 보았지만 사실 우리 스스로도 설득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말장난일 뿐이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해리에게 20세기 삽질이 통할 리 없었습니다.

연락처나 달라고 했더니 떳떳한 일이 아니어서 싫답니다. 여태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밤에 일을 하다보니 술 한 잔 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남 등처먹는 일 아니고는 떳떳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냐며....그래도 못내 아쉽긴 했습니다. 지금의 해리 모습이 변할 것 같은 선입견 때문이었을 겁니다.

요즘 20대를 두고 보수화되었다느니, 그들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는 산업화 세대요 민주화 세대인데 도대체 20대 너희들은 향락과 쾌락에만 젖어있다느니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21세기가 삶의 시작이요 터전인 20대에게 희미한 영화필름보다 더 오래됐을 것같은 20세기 사고를 강요합니다. 정작 기성세대가 20대에게 마련해준 마당은 모난 돌덩이 투성이인데 말입니다. 기계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삽질을 강요하는 모양새입니다.

낭만과 열정과 꿈으로 충만해야 할 20대를 팍팍한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여 놓고선 그들에게 보수화되었다고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요? 공부하고 일만 하지 말고 여행도 자주 다니라는 말에 해리는 대답없이 가벼운 미소만 지었습니다.

일이 끝나자마자 씻고 나왔더니 해리는 벌써 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급한 일이 있다며 죄송하단 말만 남기고 먼저 갔답니다. 사실은 세면장을 나오면서 떠나는 해리를 봤습니다. 다만 축 처진 어깨가 무거워 보여 부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해리야, 당당해라 그리고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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