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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책이 발견한 참의료인, 몽수 이헌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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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1775) 봄에 일이 있어 서울에 갔는데, 때마침 홍역이 크게 유행하여 요절하는 백성이 많았다. 몽수는 병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상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묵묵히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막 교외로 나오다가 관을 어깨에 메거나 시신을 싼 거적을 등에 지고 가는 자가 잠깐 사이에 수백 명이나 되는 것을 보았다. 몽수는 가슴 아파하며 스스로 말했다. '내게는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이 있다. 그런데도 예법에 구애되어 그냥 가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마침내 도로 인척으로 집으로 가서 자신의 비법을 펼쳤다."
-[다산의 마음]
<인술을 펼친 몽수> 중에서-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있던 몽수 이헌길은 다산 정약용이 남긴 책을 통해 참의료인의 모습으로 부활했다. 고통받는 백성들을 보며 상복까지 벗어던졌던 몽수였지만 다산의 짧은 기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가공된 이미지의 허준만을 역사 속 참의료인의 표상으로 잘못 기억할 뻔 했다.

다산의 홍역치료서인 [마과회통]도 몽수의 [마진기방]을 더욱 확장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마과회통] 서문에서도 몽수에 대한 헌정사도 빼놓지 않았다,

"어려서 홍역으로 죽을 뻔한 나를 이헌길 선생이 살려주었으니 이제 그에게 보답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몽수 이헌길에 대한 기록은 다산의 짧은 언급을 제외하면 찾기가 쉽지 않다. 다만 아직도 한방에서는 몽수가 그의 저서 [마진기방]에 남긴 승마갈근탕(升麻葛根湯, 승마, 감초, 생강 등을 넣어 달인 탕약)이란 처방을 감기로 콧물이 나고 기침하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몽수 이헌길이 누구였길래 조선시대 위대한 실학자였던 정약용이 기록으로까지 남기고 싶어 했을까? 어릴 적 홍역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다산의 목숨을 구해준 개인적인 인연도 컸겠지만 무엇보다도 두 사람 사이에는 애민(愛民)정신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몽수 이헌길의 출생과 사망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다산의 기록으로 보아 다산보다 나이가 많은 동시대 인물로 추정된다. 또 몽수는 왕가의 후손으로 조선 2대왕인 정종의 14대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몽수가 살았던 18세 조선은 홍역이라는 역병이 창궐한 때였다. 수십만 명의 백성들이 원인도 모르는 병에 목숨을 잃었다. 최소한의 치료법이 있다손 치더라도 백성들에게 의원을 찾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못꿀 일이었다. 유명한 [하멜 표류기]에는 당시 조선의 이같은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의원은 고관들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일반 백성들이 의원을 부를 여유가 없었다. 전염병에 걸리면 마을 밖 들판의 작은 초막에 데려가 살게 한다. 간호해 줄 사람이 없는 백성들은 그대로 내 버려진 채 죽을 맞았다."

이 때 나타난 이가 바로 몽수 이헌길이었다. 몽수의 처방은 즉시 효과를 보였고 그의 주변은 병을 고치려는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다산은 이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몽수가 문을 나서면 수많은 남녀가 앞뒤로 둘러쌌는데 그 형상이 마치 벌떼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가는 곳마다 뿌연 먼지가 하늘을 가려 사람들은 이것만 보고도 몽수가 온다는 것을 알았다."

위에서 언급한 승마갈근탕이 바로 몽수가 이 때 홍역을 치료했던 독창적인 처방전이었다. 당시 홍역은 유행병으로 의원들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홍역에 대한 연구를 꺼려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의원도 아니었던 몽수가 혼자서 중국의 선진 치료법을 공부하고 독창적인 홍역 치료법을 개발해 내고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의 의술을 백성들에게 펼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애민정신 이외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는 것 같다. 다산은 그의 저서 [마과회통]에서 몽수의 애민정신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근래에 몽수란 사람이 있어 명예를 바라지 않고 뜻을 오직 사람 살리는 데 두고 마진서를 취해 어린 생명을 건진 것이 무려 만 여명에 이른다."

우리는 다산의 기록, 다산이 남겨놓은 책이 아니었다면 백명의 허준과도 바꿀 수 없는 단 한 명의 몽수를 영원히 잃을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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