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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오이디푸스 왕과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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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B.C 406, 그리스지음/황문수 옮김/범우사 펴냄


2017310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날로 기억될 것이다. 헌법재판소 이정미 재판관이 말한 이 한 문장 때문이었다.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되었다. 촛불 민심의 승리라고들 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근혜 탄핵은 민주주의의 승리이자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었다. 대통령도 헌법을 지키지 않으면 탄핵될 수 있다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헌정사의 치욕적인 사건임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대다수 시민들의 기대와 달리 사저로 복귀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유한국당 민경욱 의원이 대신 낭독한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탄핵 불복을 선언했다. 국정농단에 대한 진솔한 사과를 바랬던 국민들로서는 또 다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주어졌던 소명을 다하지 못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든 결과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반성할 줄 모르는 권력의 오만함, 닮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불복 선언을 지켜보면서 문득 떠오른 대사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406)가 쓴 희곡 <오이디푸스 왕>의 한 대목이었다.


"아폴론이다. 친구여, 나의 불행, 이 쓰라리고 쓰라린 불행을 일으킨 건 아폴론이다. 그러나 내 눈을 찌른 건 내 손. 이 불쌍한 놈의 손이다! 내 눈은 즐거운 일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거늘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냐?"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주인공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범죄와 패륜이 밝혀지자 끔찍하게도 자신의 눈을 찌르는 방식으로 자기 처형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이디푸스 왕의 대사에는 반성할 줄 모르는 권력의 오만함이 짙게 깔려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저 복귀 후 밝혔던 대국민 메세지처럼 말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은 범죄에 패륜까지 저질렀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기보다는 이 모든 게 아폴론 신탁 때문이라며 항변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엮였다'거나 '기획된 음모'라며 끝까지 진실을 거부했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 왕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까지도 그야말로 닮음꼴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바이의 오이디푸스 궁전 앞에서 탄원하는 백성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희곡 전체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오이디푸스 왕>은 신화에 근거하고 있지만 신화 전체 내용을 평면적으로 나열하지는 않는다. 희곡이 시작되는 전 과정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아테네 북쪽에 위치한 테바이라는 도시국가에 라이오스라는 왕이 살았다. 라이오스 왕은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태어난 아들에게 이름도 지어주기 전에 끔찍한 아폴론의 신탁을 듣게 된다. 알다시피 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 강에 맹세하는 것과 아폴론의 신탁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다. 아폴론 신탁에 따르면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장차 성장해 어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하게 될 운명이었다.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는 불행의 씨앗을 막기 위해 아들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차마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던지 부부는 아들의 양 발목을 밧줄로 꿰어 목동에게 맡기고는 산 속에 버리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목동도 아이가 산 속에서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목동은 아이를 이웃나라 코린토스의 목동에게 맡기고 테바이가 아닌 곳에서 키워달라고 부탁한다. 



결국아이는 코린토스 왕 폴리보스의 양자가 되고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양 발목이 밧줄에 꿰어 '부은 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폴리보스 왕의 양자라는 사실을 모른 채 청년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또한 친아버지와 똑같은 신탁을 듣게 된다.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할 것이라는. 오이디푸스는 이 신탁이 실현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코린토스를 떠나고 이리저리 방황하던 중 테바이로 가는 세 갈래 길에서 마차에 탄 노인과 그 수행원들을 죽이게 된다. 이 노인이 다름아닌 오이디푸스의 친아버지 라이오스 왕이었다. 라이오스 왕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면 가차없이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스핑크스라는 괴물을 퇴치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델포이로 가는 중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오이디푸스, 박정희 신화의 막을 내린 박근혜


이 사건 이후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 도착하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의 아내이자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고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았다. 오이디푸스가 왕이 된 이후 테바이는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신들은 오이디푸스의 범죄를 묵과할 수 없었다. 신들의 저주로 테바이에는 역병과 기아가 돌았고 모든 백성들이 고통으로 신음했다. <오이디푸스 왕>은 오이디푸스 궁전 앞에서 탄원하는 백성들 앞에 등장한 오이디푸스 왕의 대사로 시작된다.


신들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의 방법밖에는 없다.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밝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은 백성들 앞에서 당당히 선언한다. 백성들이 원하는 무슨 청이든 다 들어주겠노라고. 아폴론 신탁에 의하면 라이오스 왕의 살해범을 밝히고 테바이에서 추방하는 것만이 역병과 기아를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세 갈래 길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의 등장으로 라이오스 왕 살해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의 결백함에 대해 지나친 오만한 자세로 일관한다. 오히려 처남인 크레온이 테이레시아스를 부추겨 자신을 추방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오카스테 왕비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의 오만에 찬 한 마디.


"은밀히 나를 배반하는 자가 재빨리 움직일 때에는 나도 재빨리 대책을 세워야 하는 법이다. 가만히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으면 그는 목적을 이루고, 나는 망할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 중에서-


특검과 헌재가 최순실 국정농단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의 증거가 넘쳐나는데도 부인으로 일관했고 되려 음모론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런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응을 두고 혹자는 성장기 청와대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이십 년 가까이 지속된 은둔생활로 상황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석하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자기 확신에 대한 오만함은 탄핵 이후에도 변하지 않고 있다.


진실은 늘 구름 위에 있다고 했다. 구름이 걷히면 언젠가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 진실이다. 오이디푸스 왕의 범죄와 패륜이 그랬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사건이 그랬다. 하지만 실체를 드러낸 진실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문학 장르로써의 비극은 '공포와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켜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 Catharsis)'를 도모한다고 했다. 물론 초유의 현직 대통령 탄핵이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성취감을 제공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 왕이 실제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 신화라는 왜곡된 현실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비극은 비극이다. 비극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 사회는 또 하나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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