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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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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농군'이 친일논란에 휩싸인 이유 [20세기 한국소설] 중 이태준의 『농군』/「문장」임시증간 창작32인집(1939.7)/창비사 펴냄 창권이네 가족은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이들과는 동떨어져 보이게 창백한 아내 이렇게 넷뿐이다. 그들은 고향 강원도를 등지고 장춘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현재 이 가족에게는 밭 판 돈 삼백이십 원이 전부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만주의 쟝쟈워푸라는 곳이다. 창권이가 다니던 보통학교 교사였던 황채심의 권유로 이곳 이역만리 만주땅에 한 가닥 희망을 일구려 하고 있다. 쟝쟈워푸는 조선 땅과 달리 산도 없고 소 등어리만한 언덕도 없는 그야말로 황무지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조선 사람들이 지금은 근 삼십 호의 조그만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아무리 중국 정부로부터 개간권을 부여 받았다지만 이곳..
'민촌' 쥐는 쥐인 척 해야 제격이다 [20세기 한국소설] 중 이기영의 『민촌』/「조선지광」50호(1925.12)/창비사 펴냄 "쥐는 쥐인 척하는 것이 오히려 제격에 들어맞는 법이다. 작자는 여실하게 부르조와 연애소설이나 쓰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비위에 맞는 강담소설이나 쓸 것이지 아예 이와 같은 무모한 경거망동의 만용은 부릴 것이 아니다. 아무리 관념론자이기로 이만한 이해관계는 구별할 만한 두뇌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사람이 있다면 가슴을 쓸어내려도 될 듯 싶다. 그대가 아니니 안심해도 좋다는 말이다. 쥐이면서 쥐가 아닌 양 행세한다는 이는 다름아닌 춘원 이광수이기 때문이다. 조국해방을 황국신민이 못된 아쉬움으로 토로했던 뼛 속까지 친일파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추..
왜 일본은 이광수에게 조선예술상을 주었을까? 이광수의 /1917년 김동인의 소설 『태형』이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비인간성을 묘사하고 있다면 이광수의 소설 『무명』은 동일한 감옥이지만 일반 감옥이 아닌 병감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을 그려내고 있다.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여기서 무명은 빛이 없는 세상(無明)으로 닫힌 극한의 세계를 의미한다. 내용은 이렇다. 병감에는 작중화자 '나'를 비롯해 공문서 위조단의 공범 윤씨와 방화범 민씨, 설사병 환자 정씨, 신문지국 기자로서 부자와 과부 며느리의 불륜을 폭로하겠다는 댓가로 금품을 뜯어낸 강씨 그리고 또다른 방화범 간병부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를 비방하며 알수없는 자존감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헐..
처녀를 사랑한 유부남, 자유연애를 말하다 이광수의 /1917년 춘원 이광수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손꼽힌다. 이 두사람에게는 한국 문학사적 업적 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이광수와 최남선은 각각 와 을 기초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극적인 친일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위대한 천재 문학가들이었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회유를 견디지 못하고 변절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만 했던 이들을 보면서 아픈 역사를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어린 벗에게』를 살펴보기 전에 저자 이광수에 대한 짤막하나마 약력을 소개해야만 하는 것도 아픈 과거를 되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삼기 위함이다. 출판사의 이광수 소개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춘원 이광수는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타협을 거부한 지식인의 핍박, 결국 親日로 돌아서다 현상윤의 /1917년 1992년을 잊지 못한다. 그해 총선이 있었고 대선이 있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성인이 되어 행사할 수 있는 투표라는 행위를 하게 되었다. 투표뿐만 아니라 직접 선거운동에 참여하는 경험까지 했다. 나는 당시 백기완 대통령 후보와 민중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물론 선배의 권유도 있었지만 소위 전교조 1세대인 나로서는 이미 고등학교 때 희미하게나마 현실에 눈을 떴던 것 같다. 그 당시 선거운동 참여도 나름대로는 자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이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기까지는 고민도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시 선배들은 민중세력의 정치세력화를 두고 직접 참여하자는 쪽과 보수야당의 비판적지지를 통해 때를 기다리자는 쪽으로 나뉘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