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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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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심장은 조국과 첫사랑에 바친 사랑이었다 ‘즉흥 환상곡’으로 유명한 쇼팽(Fryderyk Franciszek Szopen, 1810~1849)은 낭만주의 시대를 대표했던 음악가 중에 한 명으로 폴란드 태생이었지만 주 활동무대는 프랑스였다. 폴란드 출신이었지만 폴란드 오페라를 단 한 곡도 작곡하지 못했다. 또 그가 조국을 떠나 활동했던 시기는 러시아에 대항해 폴란드인들의 저항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던 때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쇼팽이 죽었을 때 폴란드 망명 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는 그에게 깊은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쇼팽은 1849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파리의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하지만 쇼팽의 시신에는 심장이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영화 '쇼팽, 사랑의 열망'(2002) 중에서 젊은 나이에 요절한 쇼팽에게는 생전에 두 명..
일제는 왜 <금수회의록>을 금서로 지정했을까 안국선의 /1908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나타났던 고전소설과 현대소설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던 소설의 한 갈래를 신소설이라고 한다. 김동인의 소설을 근대소설의 시작으로 본다면 신소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월씬 광범위한 작가와 작품을 포괄한 소설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는 이인직이 꼽힌다. 그러나 그의 친일행적들이 밝혀지면서 이인직을 신소설 대표작가로 교과서에 올려도 되는지에 대한 논의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하기야 몸만 조선인이었을 뿐 정신은 온통 내지인(일본인)이었으니 그를 한국 문학사의 주연급으로 대우한다는 것도 문학인들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최근에는 의 저자 이해조를 신소설 대표작가로 부상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은 힘을 얻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