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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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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이기가 애물단지일 때도 있다 전화/도로시 파커(Dorothy Parker, 1893~1967, 미국)/1930년 제발, 하느님, 그 사람이 지금 저한테 전화 좀 하게 해 주세요. 사랑하는 하느님, 저한테 전화 좀 하게 해 달라고요. 다른 부탁은 안 할게요. 정말이에요. 큰 부탁도 아니잖아요. 힘든 일도 아니에요. 하느님한테는 아주 하찮은 일이니까요. 그냥 전화만 하게 해 주면 돼요. 네? 제발요, 하느님. 제발요, 제발, 제발. - 중에서-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 이 여자. 무척이나 초조해 보인다. 그저 전화만 기다리는 게 아닌가 보다. 전화가 오면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도대체 갈피를 잡지 못한다. 500까지 다 세기 전에 받지 말아야지 하면서 숫자를 헤아려 보지만 얼마 못가 다시 '제발 좀 울려라' 하면서 아무런 반..
이 남자가 젊은 여자에 집착하는 이유 소녀병/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1871~1930, 일본)/1907년 한 남자가 있다. 생긴 걸로 치면 볼품 없을 정도가 아닌 오싹할 정도로 형편없다. 나이는 어림잡아 서른일곱 여덟 정도이고, 새우등에 들창코, 뻐드렁니, 거무스름한 구렛나룻이 얼굴의 반을 덥수룩하게 덮고 있어 언뜻 보면 무서운 생김새다. 그러니 젊은 여자들이 낮 시간에 마주쳐도 오싹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생김새와는 어울리지 않게 눈은 온화하고 성격은 상냥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남자의 독특한 취향? 나쁜 버릇? 이 남자의 이름은 스기다 고죠로 젊은 시절 꽤 이름있는 소설가였다. 서른일곱이 된 오늘날에는 별 볼일 없는 잡지사의 직원이 되어 보잘 것 없는 잡지 교정이나 하고 있지만 한 때는 대중의 박수..
목적이 상실된 현대인의 초상 이상한 정열/기준영/2013년 세족식(洗足式, 카톨릭 교회 의식의 하나)이 열리고 있는 성당, 남자의 시선이 한 여성의 다리를 향하고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은 프란시스코이고 그가 그렇게 집중하고 있던 다리의 주인은 글로리아다. 그 날 이후 프란시스코는 병적일 만큼 글로리아에게 집착한다. 글로리아는 프란시스코의 친구와 결혼할 사이다. 프란시스코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글로리아에게 끊임없는 구혼을 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못한다. 프란시스코의 의처증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짧은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프란시스코는 사제의 길을, 글로리아는 라울과 결혼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프란시스코가 있는 성당을 방문한다. 헤어진 아내를 몰래 훔쳐본 프란시스코는..
나르키쏘스를 향한 에코의 집착이 남긴 것 짝사랑은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다. 사랑의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나던 시절 찾아온 풋사랑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짝사랑이다. 요즘 아이들이야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데 망설임이 없지만 불과 70,80년대만 하더라도 이성을 바라보면 얼굴부터 붉어지곤 했다. 하기야 남자학교 따로 여자학교 따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으니 요즘 남학생과 여학생이 손을 잡고 다니는 풍경을 볼 때면 격세지감을 느끼곤 한다. 짝사랑이 추억의 한 켠을 채우고 있는 것도 이성에 대한 호기심과 여전히 사회적 관습의 불일치가 기억의 파편처럼 문득문득 떠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가을이 붉어가는 이 때 산 정상에서 한 때 풋사랑의 대상이었던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도 그리움의 계절이 주는 낭만은 아닐런지. 혹시 아는가! 저 멀..
화가와 창녀와 현대 도시인의 공통점 도시의 향기/채영주/1993년 내가 아는 물고기들은 그런데 대체로 외롭다. 특히 아름다운 태국 버들붕어의 경우를 보라. 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 이외의 어느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다.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다가 동일한 족속의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들은 온몸을 핏빛으로 물들인다. 정열의 불길이 지느러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간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대안이 있을 뿐이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 상대방을 죽이느냐 혹은 화려한 사랑행위를 시작하느냐, 그러나 어느 쪽을 택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싸움으로 상대가 죽어도 그들은 혼자가 되며 사랑이 끝나도 수컷은 암컷을 쫓아버린다. 세상은 어차피 혼자라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현자들인 것이다. - 중에서- 지독하리만치 '절대고독'에 집착하는 이가 있다. 그는 해..
아름다움은 욕구가 아니라 희열이다 괴로운 이와 상처받은 이는 말하리, "아름다움이란 친절이요 정다움. 마치 그녀 자신의 영광이 조금은 부끄러운 젊은 어머니처럼 그것은 우리 사이를 거니는 것." 또 정열적인 이는 말하리, "아니야, 아름다움이란 힘이나 공포같은 것. 마치 폭풍처럼 우리 발밑의 땅을 흔들고 우리 위의 하늘을 흔드는 것." 피곤하고 지친 이는 말하리, "아름다움이란 부드러운 속삭임. 그것은 우리 영혼 속에 말하는 것. 그 목소리는 마치 그림자가 두려워서 떠는 가냘픈 빛처럼 우리 침묵을 따르는 것." 그러나 침착하지 못한 이는 말하리, "우리는 그곳이 산속에서 외치는 걸 들었으며, 그것과 함께 말발굽 소리, 날개치는 소리 그리고 사자의 울부짖음도 들었노라." 밤이면 마을의 파수꾼은 말하리, "아름다움은 새벽과 더불어 동쪽에서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