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여호의 책이 있는 풍경

노동의 새벽/박노해/1984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며 활동하는 노동형제들에게 조촐한 술 한상으로 바칩니다.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1984년 타오르는 5월에' 이 땅의 노동형제들을 향한 저자의 애틋한 사랑과 연대의 말로 시작된다. 어쩌면 저자는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쓰러져간 수많은 노동자들에 대한 애도를 '조촐한 술 한상'을 바치는 심정으로 시를 썼는지도 모르겠다. 벌써 횟수로 삽십 년이다. <노동의 새벽>이 노동자의 삶을 그린 어떤 소설이나 시보다도 감동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저자가 이 땅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온몸으로 부대낀 노동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피끓는 대학 시절 읽었던 <노동의 새벽>을 다시 꺼내 든 노동절 아침, 세 번씩이나 변신을 거듭했던 강산(강산)이 무색할 정도로 오늘의 노동현실은 시 속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권력과 자본의 탄압은 더 교묘해지고 악랄해졌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왜곡 시스템은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런상황들을 인지하지 못할만큼 견고하고 완벽한 영주의 성이 되고 있다.  

 

 

내일 당장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것처럼 떠벌이지만 이 땅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을 근근이 버텨내고 있다. 그런데도 대체휴무니 폐지되었던 공휴일 부활이니 하면 자본과 언론은 마치 한국경제가 무너질 것처럼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어디로 갈꺼나/눈부시게 푸르른 오월/얼마 만에 찾아먹는 휴일인데/정순이는 오늘도 특근이란다/……/사장님은 교양 때마다/놀면 돈만 쓰니 젊을 때 열심히/잔업에다 휴일특근 시키는대로/다 여러분 위해서 가족처럼 말씀하시고/제미랄 좃도!/안쓰고 안먹고/조출철야 휴일특근 몸부림쳐도/가물액만 늘어가고/계획은 조각나 버려/아 그렇게도 기다리던 휴일날/어디로 갈꺼나/갈 곳이 없다/……/ -<노동의 새벽> '어디로 갈꺼나' 중에서-

 

'개나리 꽃눈이 춤추며 나는 휴일이라 생기도는 아이들 얼굴'을 보며 '스물 다섯 청춘 위로 미싱 바늘처럼 꼭꼭 찍혀오는 가난에 울며 떠나던 아프도록 그리운 사람'이 있어 특근이며 잔업은 배부른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지문이 문드러져 없어질 때까지.

 

평생토록 죄진 적 없이/이 손으로 우리 식구 먹여살리고/수출품을 생산해 온/검고 투박한 자랑스런 손을 들어/지문을 찍는다/아/없어, 선명하게/없어,/노동 속에 문드러져/너와 나 사람마다 다르다는/지문이 나오지를 안아/없어, 정형도 이형도 문형도/사라져 버렸어/임석경찰은 화를 내도/긴 노동 속에/물 건너간 수출품 속에 묻혀/지문도, 청춘도, 존재마저/사라져 버렸나봐/ -<노동의 새벽> '지문을 부른다' 중에서-

 

 

잔업이며 특근으로 일상을 다 양보한 노동자들의 삶은 좀 나아졌을까. 천만에 말씀. 잔업이며 특근은 일상을 버텨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최저 생활비에도 못미치는 최저임금. OECD 국가 중 최하위는 둘째치고 그 깔보기 좋아하는 태국보다도 못하다는 최저임금. 그나마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가 수 백만이란다. 이런데도 자본과 권력, 이들의 종노릇에 충실한 언론은 대체휴무니, 최저임금 몇 십 프로 인상하자면 기업들 다 줄도산이란다.

 

신문에선 물가가 제자리 숫자라는데/주인네는 셋돈을 올려달라 하고/공공요금 고지서가 무거워만 가고/아내는 시장에 다녀올 때마다/가벼워진 장바구니를 들며 울상이다/임금동결 정책에 넋을 잃다가/매주 4시간을 더 연장노동 해도/적자가계부를 들여다보며/아내는 어두운 한숨이 늘고/프로야구장엔 환호가 일고/프로축구장엔 열기가 뜨겁고/우린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노동의 새벽> '모를 이야기들' 중에서-

 

그렇게 노동자를 옥죄온 결과가 우리나라 기업의 노동생산성이 OECD 국가 중 최하위란다. 그럴 수밖에. 노동자는 기계가 아닌데. 기계도 정기적으로 윤활유를 발라줘야 돌아가는데 이 땅의 노동자들은 너무 뻑뻑해서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기계를 돌리고 있다. 누군가 쏟아내는 '산업 역군'은 그야말로 노동자를 향한 비아냥일 뿐이다.

 

시인은 말한다. 노동자가 살 길은 연대뿐이라고. '썩으러가는 군대지만 그곳에서 연대를 배워오자'고. 시인의 바램은 실현된 듯 했다. 치열했던 민주화 과정을 겪으면서 노동조합이 생기고 노동자들을 탄압했던 악법들이 하나 둘 철폐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성숙했다는 21세기 대한민국. 여전히 노동자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크레인 위에서 생존권을 외치며 마지막 몸부림을 하고 있다. 자본과 권력과 언론의 연합전술로 언제부턴가 노동조합은 '한국경제의 걸림돌'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본, 권력, 언론의 연대는 노동자들의 그것보다 막강했다. 

 

행복시대를 열겠다던 새 대통령도 당선된지 네 달, 취임한지 두 달이 넘었지만 여태 노동자들에게 손 한 번 내민 적이 없다. 이것은 이 땅의 노동자들이 처한 엄연하고도 엄중한 현실이다. 노동자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시인이 말한 연대의 꿈은 현재 진행형이고 앞으로 노동자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기계인지도 몰라/컨베이어에 밀려오는 부품을/정신없이 납땜하다 보면/수천번이고 로버트처럼 반복동작 하는/나는 기계가 되 버렸는지도 몰라/어쩌면 우리는 양계장 닭인지도 몰라/라인마다 쪼로록 일렬로 앉아/희끄무레한 불빛 아래 속도에 따라 손을 놀리고/빠른 음악을 틀어주면 알을 더 많이 낳는/양계장 닭인지도 몰라/진이 빠져 더이상 알을 못낳으면 폐닭이 되어 켄터키치킨이 되는 양계장 닭인지도 몰라/ -<노동의 새벽> '어쩌면' 중에서-

 

 

어느 문학 평론가는 <노동의 새벽>을 노동문학의 고전이라고 말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늘 이 땅의 노동현실은 그 속에 담겨있는 시인의 외침만은 결코 고전이 될 수 없는 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자본과 권력과 언론의 삼각연대가 해체되지 않는 한, 아니 노동자의 힘으로 이 견고한 삼각연대를 깨부수지 않는 한 <노동의 새벽>은 현실이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노동절에 다시 꺼내 든 <노동의 새벽>은 그 세월만큼이나 누렇게 빛이 바랬고 눅눅한 종이 냄새가 온 방안을 가득 채운다. 그 때는 몰랐을까. 책 표지 바로 다음에 붙은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판화 두 장만은 여전히 깨끗한 흰색을 간직하고 있다. 노동절 오후 나는 다시 '노동의 새벽'을 읽는다.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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