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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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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어머니 몰래 눈물을 흘린 이유 눈길/이청준(1939~2008)/1977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이 있다. 어떤 조직이나 모임에서건 꽉 차 있을 때는 개인의 존재감을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가 빠진 듯 한쪽 구석이 횡 하니 비어 있을 때는 비로소 개인의 부재가 느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스포츠에서 '난 자리'는 전력 누수로 이어지고 여타 조직이나 모임에서도 '난 자리'의 등장은 효율이 비효율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곤 한다. 부재란 그렇게 현실로 다가올 때만 느낄 수 있는 인간 감각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든 자리'와 '난 자리'의 결정적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난 자리'의 존재가 간절해 지고 때로는 죄책감으로 이어질 때가 있다. 바로 가족이다. 그게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면 더더욱 그렇다. 어머니에게 빚 진..
태어나 처음 만난 아버지가 불편했던 이유 봉숭아 꽃물/김민숙/1987년 어릴 적 이맘때쯤이면 고향집 마당 한 켠에는 마치 노래에서처럼 담장에 바짝 기대어 봉숭아꽃이 붉게 물들었다. 붉게 물든 것은 봉숭아꽃만이 아니었다. 연신 손부채질을 하고 계신 어머니의 손톱도, 어머니 무릎을 베개 삼아 꿀맛같은 단잠을 자고 있는 여동생의 손톱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동생의 손톱이 부러웠는지, 봉숭아 꽃물이 잘 물들도록 어머니 무릎을 베고 자고있는 동생을 시샘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어머니를 졸라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 하나에만 봉숭아 꽃잎 이긴 것을 올려놓고 이파리로 감싼 뒤 실로 칭칭 동여맸다. 동생처럼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베고 손에는 번지지 않고 손톱에만 예쁘게 물들기를 기도하며 잠이 들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글자를 모를 때의 일이었지, 국..
엽기적 결말에 담긴 삶과 죽음의 관계 명랑/천운영/2004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입관하던 날 차마 울 수가 없었다. 앙상한 뼈 마디마디에 가죽만 볼품없이 붙어있었지만 얼굴만은 생전에 볼 수 없었던 너무도 편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포시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한테 퍼주기 좋아하셨지만 되돌아오는 건 배신과 가난뿐이었기에 술로 시름을 달래셨고 급기야 어디 성한 데 하나 없는 몸은 밤마다 들릴 듯 말듯 괴로운 신음소리만 연주했던 아버지였지만 그날만큼은 근심 걱정 하나 없는 표정으로 누워계셨으니 눈물을 훔치는 게 예의가 아니지 싶었다. 정작 서러운 눈물은 화장이 끝나고 아버지의 유골을 보여주었을 때였다. 남한테는 마냥 좋은 사람이 늘 그러하듯 아버지도 자식들에게는 그리 살갑지 못했고 게다가 나 또한 부침성 없는 성격이라 평생을 부자지간의 정을 제..
새끼를 잡아먹는 어미 금붕어가 상징하는 것 옥천 가는 날/김 숨/2011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있다.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언덕 쪽에 머리를 둔다는 뜻이다. 비단 동물뿐일까. 아니 동물도 이럴진대 인간이야 오죽하겠는가. 인간은 늘 고향이라는 대상을 그리워한다. 나이가 들어 세상과 이별해야 할 때 누구나 할 것 없이 고향을 찾는다. 고향에는 나의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존재가 한낱 기계 부속품화 되어 자기 정체성이라곤 작은 바람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현대사회에서 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향의 존재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단 하나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나의 존재가 비롯되는 곳, 고향은 바로 어머니의 자궁과도 같은 곳이다. 김 숨의 소설 은 인간의 회귀본능, 즉 근원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자화..
어떻게 사느냐에 관한 두 개의 시선 만취당기(晩翠堂記)/김문수/1989년 지지송간반울울함만취(遲遲松澗畔鬱鬱含晩翠) 저 시냇가의 소나무는 더디고 더디게 자라지만 무성하고도 늦도록 푸르도다. 비파만취 오동조조(枇杷晩翠 梧桐早凋) 비파는 겨울철에도 푸른 잎이 변하지 않지만 오동나무는 그 잎이 일찍 시든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지키며 사는 삶.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물음에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않고 서 있는 소나무는 이런 삶과 이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주는 소재가 되어왔다. 생소하긴 하지만 잎사귀와 열매가 비파(毖琶)라는 악기를 닮았다는 비파나무도 겨울에 꽃을 피우고 여름에 열매를 맺는 상록수라고 한다. 어쩌면 소나무보다 더한 지조와 절개의 상징물이 비파나무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여기 지조와 절개를 의미..
아버지의 가부장적 폭력과 딸의 충격적 일탈 저녁의 게임/오정희/1979년 악보를 정리하는 일을 하고 있는 성재는 어릴 적 아버지로부터 폭행을 당해 귀가 멀어버린 여자다. 어느 날 트럭의 경적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앞서 가다가 트럭 운전수로부터 뺨을 맞고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을 떠올리며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된다. 술만 취하면 폭력을 행사하곤 했던 아버지 때문에 오빠와 어머니가 죽었지만 그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만 있을 뿐 지금은 치매에 걸려있는 아버지를 떠나지 못한다. 제정신이 아닌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건강에 욕망에는 무한한 집착을 보인다. 어느 날 탈주범이 그녀의 집을 침입하게 되고 그 충격으로 잊었던 과거를 생각해 내고는 잃어버렸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매일 저녁 습관처럼 반복되는 아버지와의 화투놀이, 그날 밤 그녀는 다시 시작된..
아버지의 흔적에 하염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한남철의 /1991년 유방암 수술, 당뇨, 골다골증, 고혈압…. 아버지가 떠난 후 종합병동인양 갖가지 질병을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달고 사는 어머니가 가장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미운 정도 정이라고 평생 무능력한 알콜 중독 남편을 떠나보내고 그 외로움은 어떻게 견디며 살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히 고단한 세월의 무게로 단련되었던지 그래도 몇 달 동안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나도 그동안의 불효의 시간들을 만회라도 할까싶어 그 싫어하던 전화도 자주 하고 틈나는대로 집에 내려가는 걸 보면 아버지가 나에게 훈계라도 하려고 그렇게 일찍 돌아가셨나 싶기도 하다. 얼마 전 집에 내려가서 우연찮게 아버지의 흔적들을 발견하고는 울컥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부자지간에 그리 살갑게 살아오지 못한..
기름 보일러 때문에 불효자의 겨울은 더디더디 김종광의 /2011년 어느 시골 농가 주름이 깊게 패인 아버지가 소를 몰고 들어온다. 어머니는 맨손으로 두껍게 언 얼음을 깨느라 분주하다. 방에 들어온 노부부는 아랫목에 손을 녹이고는 짧은 대화를 나눈다. “에이그, 방이 왜 이래” “이 추운데 애들 고생이나 안하는지, 원” 다시 눈쌓인 농가가 화면에 잡히고 자막과 함께 며느리로 보이는 어느 여인의 나레이션이 이어진다. “여보, 아버님 댁에 XX보일러 놓아드려야겠어요.” 1990년대 어느 보일러 전문기업의 TV광고는 이렇게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카피로 인기를 끌었다. 이 광고는 ‘따뜻한 사회 만들기’라는 공익적 성격을 띠면서 다양하게 진화해갔다. 자사 제품의 홍보 대신 전통적 윤리의식을 강조한 카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광고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