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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8.13 연인의 은밀한 만남에 분노한 이유 (6)

밀회/이반 투르게네프(Ivan Sergeevich Turgenev, 1818~1883, 러시아)/1860년

 

아득한 옛날, 사산 왕조의 샤리야르 왕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은 엉뚱한 곳에서 찾아오고 말았다. 어느 날 샤리야르 왕은 부인이 흑인 노예와 은밀하게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게다가 샤리야르 왕의 부인은 흑인 노예와 온갖 음탕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분노한 샤리야르 왕은 아내와 흑인 노예를 처참하게 죽이고 그날 이후 여자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살게 되었다. 매일 밤 여자를 침실로 들이고는 날이 새기 전 죽이는 일을 반복했다. 이 죽음의 굿판을 멈추게 한 것은 다름아닌 샤라자드(세헤라자데라고도 함)라고 하는 사산 왕조 대신의 딸이었다. 샤라자드는 샤리야르 왕에게 매일 밤 세상의 온갖 신기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목숨을 지켜 나갔다. 무려 천 하루 동안이나. 그 유명한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여기 남녀의 은밀한 만남을 목격하고는 분노에 들끓는 또 한 명의 남자가 있다. 그렇다고 샤리야르 왕이 목격한 것처럼 은밀한 만남의 주인공이 자신의 부인이거나 애인도 아니다. 생면부지 낯선 연인의 은밀한 만남이었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밀회>의 주인공 는 가을빛이 완연한 사월 어느 날 자작나무 숲 속을 거닐다 어느 연인의 밀회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는 왜 그랬을까? 투르게네프의 뛰어난 자연 묘사 때문인지 제목에서의 은밀한 만남이 과연 나오기는 하는 것일까 궁금해진다.

 

▲사진>구글 검색

 

산들바람이 살며시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에 젖은 숲 속은, 구름 속에 가려진 태양이 나오고 들어감에 따라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숲 속의 나무들은 번갈아 미소 짓듯 찬란하게 비치고, 드문드문 서 있는 가느다란 자작나무가 흰 명주처럼 반짝이기도 했다. 키가 크고 곱슬곱슬한 아름다운 양치줄기는 무르익은 포도처럼 가을 햇빛으로 물들고 눈앞에 뒤엉킨 채 투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다가 주위는 갑자기 푸른빛을 띠기도 했다. 선명한 빛깔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얀 자작나무가 빛을 잃은 채 싸늘하게 비치는 녹지 않는 겨울눈처럼 하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밀회> 중에서-

 

어쨌든 는 낯선 연인의 밀회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낯선 연인에 대한 의 첫인상은 이 두 사람의 은밀한 만남이 결코 행복한 순간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녀의 얼굴은 어디를 보나 아름다웠다. 약간 크고 동그스름한 턱까지도 눈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든 것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었다. 구김살 없는 얼굴에 왠지 모르는 서글픔이 담겨 있었는데 거기에는 어쩔 수 없는 천진난만한 앳된 슬픔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어디로 보나 부유한 지주 댁의 젊은 바람둥이 머슴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입은 옷은 몹시 화려하고 한껏 멋을 부린 듯 보였다. 그러나 분명 주인에게서 물려받은 짧은 외투로 단추를 단정히 끼우고, 끝이 보라색으로 물든 장밋빛 넥타이에 금테가 달린 검정 비로드 모자를 눈썹 밑까지 내려쓰고 있었다. -<밀회> 중에서-

 

이 연인의 은밀한 만남은 남자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였다. 여자는 매달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매달리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더욱 거만하고 오만해졌다. 흐느껴 우는 여자는 남자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는 듯 단 한마디만 해주고 떠나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남자는 이런 여자의 애원을 뒤로 한 채 성큼성큼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는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주기 위해 만든 들국화 꽃다발을 주워 들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자의 모습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는 왠지 모르게 슬프고 화가 났다.


추수를 끝낸 누런 밭두렁에 거센 바람이 정면으로 휘몰아쳤다. 조그마한 가랑잎 하나가갑자기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내 곁을 지나 한길을 건너서 숲을 따라 날아가고 있었다. 들판에 병풍처럼 우거진 숲은 물결치듯 수선스럽게 뒤흔들면서 저녁놀을 받아 반짝이며 물결치고 있었다. 빨갛게 물든 모든 풀, 지푸라기, 거미줄까지도 가을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문득, 나는 슬픈 마음이 들어 걸음을 멈추었다. 시들어가는 자연의 슬픈 미소 속에는 우울한 겨울의 공포가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밀회> 중에서-

 

사랑이란 무엇일까?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감정에 의해 만나고 헤어질 수 있는 것일까?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전근대적인 남성 우월적 사고에 빠진 쪽이 이 연인의 남자라면 여자는 순종과 복종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전근대적인 여성의 표상이었으리라. ‘가 슬프고 화가 난 것은 비단 남자의 거만한 이별 통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성으로서 최소한의 자존감마저 포기해 버린 여자의 태도 또한 를 슬프고 화가 나게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자작나무 숲이 이토록 아름답지만 않았어도 이 연인의 은밀한 만남은 그저 그런 연인의 사랑 놀이에 불과했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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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트랙백 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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