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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06 커피와 함께 삼켜버린 바퀴벌레의 단상 (28)

이승우(1959~)의 <구평목씨의 바퀴벌레>/「문학사상」163호(1986.5)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어본 독자라면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경험이 생생할 것이다. 보험회사 외판원으로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던 그레고르 잠자, 그는 어느날 자고 일어나보니 끔찍한 벌레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결국 그는 썩은 사과에 등을 맞고는 벌레로 생을 마감한다. 충격적인 이 소설은 현대성과 현대인에 대한 의문을 남긴 채 세계적인 고전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카프카의 <변신>이 주었던 충격만큼은 아니지만 어느날 커피와 함께 삼켜버린 바퀴벌레로부터 끄집어낸 잡지사 선배의 신경과민 증세는 단순한 의학적 병리현상을 떠나 시대를 고민하는 어느 지식인과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격한 대비를 이루면서 무한한 호기심을 자아내는 소설이 있다. 이승우의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잡지사 기자인 나는 어느날 커피를 마시다 바퀴벌레를 삼켜버리고 만다. 이 구역질나는 상황에서 학교 선배이자 잡지사 고참인 구평목씨의 결근 사유는 묘하게 '바퀴벌레 때문에'라는 말로 설명되고 만다. 다시 이 상황은 전날 허름한 술집에서 알게된 구평목씨의 과거와 기막히게 중첩된다. 학생운동으로 수감생활을 했던 구평목씨는 감방 안의 바퀴벌레 때문에 참을 수 없는 밤들을 보내왔다. 그 무렵 개전의 정이 뚜렷하고 시위에 충동적으로 참가한 사실이 인정되어 동료들을 남겨두고 먼저 석방된다. 이 때 그에게 던져진 비난과 경멸에 구평목씨는 '바퀴벌레 때문에'라는 명분을 마련하게 된다. 출소한 구평목씨는 감옥에서의 기억으로 신경과민 증세를 보이게 되고 누군가 자기를 감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소설에서 바퀴벌레는 세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납작한 몸체에 미끈미끈한 등짝의 광택을 이용하여 현저하게 좁은 틈새로 잽싸게 숨어 들어가는 도피주의자,
예민한 더듬이를 안테나처럼 현란하게 움직여 거기에 어둠이 탐지되면 비로소 기어나와 눈치를 살피며 거동을 시작하는 기회주의자,
퇴화된 날개를 장식처럼 달고서 하늘을 꿈꾸는 대신 장판 밑의 그늘에 안주하는 패배주의자.

주위에서 구평목씨는 비난하기 위해 만든 말이지만 바퀴벌레의 상징을 알기 위해서는 소설이 발표된 198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에 의한 억압과 폭력이 난무했던 시절, 그 시대의 상징이자 현실이었던 감옥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동료들을 남겨둔 채 먼저 출소한 어느 지식인의 고민이자 당시 사회를 관조했던 많은 이들이 가졌던 죄의식의 발로가 바퀴벌레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폐쇄된 공간에서의 기억은 신경과민이라는 병리적 증세로까지 확대된다. 

저자가 늘 품고살아야 했던 시대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불쾌한 흔적이었던 바퀴벌레를 살상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왼발을 살짝 들고 앞창 부위에 힘을 모아 내리눌렀다. 그리고 다시 좌우로 비껴 문대면서 압력을 더해갔다. 신발 밑창으로부터 끈끈한 핏덩이가 뭉개지는 감촉이 불쾌하게 전달되어왔다. 아마도 그 불쾌감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중에서-

그러나 나의 이런 행위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은 바퀴벌레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 음침한 곳을 잽싸게 휘젓고 다니는 바퀴벌레에 어느 누구도 불쾌하다거나 구역질나는 느낌은 커녕 아예 시선도 두지 않는다. 그래서 <구평목씨의 바퀴벌레>는 국가의 억압과 폭력에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소심한 풍자가 담겨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비단 80년대를 살았던 어느 지식인의 고민만은 아닐터...2011년 오늘도 내 주변 습하고 음산한 곳 어딘가에서는 바퀴벌레가 활보하며 순간순간 눈앞을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지만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바퀴벌레의 활보가 빛의 속도인양 무관심하게 일상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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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트랙백 1 : 댓글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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