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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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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둘 노인의 자살과 농촌 경제의 현실 장곡리 고욤나무/이문구/1991년 한 대학교수가 2002년 경부고속도로와 인접한 경기도 평택에 배나무 밭과 일대 논 4필지, 2만7천여 제곱미터를 동생 2명과 함께 매입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이 운영하는 친환경농산물 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이 대학교수가 공동으로 매입했다는 평택 과수원에서는 9년 동안 연평균 3억원씩 총 27억원의 수입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이 대학교수는 동생에게 3억원의 채무를 졌는데 특이한 점은 형제의 거래가 현금보관증 형태로 이뤄졌고, 이 현금보관증에는 '상기 금액(3억원)을 성실히 보관하고 요청에 따라 반환할 것을 약속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한편 이 대학교수는 매입한 논에서 쌀 직불금을 타가기도 했다. 장관 후보자 청문회때면 이런 비슷한 내용들이 어..
의좋은 형제는 왜 도둑이 되었을까 오유권(1928년~1999년)의 /1963년 가난하지만 의좋은 형제가 있었다. 봄에는 같이 모내기를 하고 여름에는 함께 풀도 뽑았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프다는 속담도 있건만 이 형제에게는 예외였나 보다. 형제는 가을이 되자 넉넉하지는 않지만 무사히 추수를 끝냈다. 추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 형과 아우는 서로의 비루한 처지를 생각하며 몰래 도와주기로 결심한다. 모두가 잠든 밤, 형은 자신의 볏단을 아우의 논에 옮겨놓고 아우는 아우대로 자신의 볏단을 형의 논에 옮겨놓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도 아니고 밤마다 볏단을 날랐음에도 불구하고 볏단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형제는 어느날 밤 논 한가운데서 마주치고 그동안 벌어졌던 일에 대해 알게 된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국어..
성공적인 귀농을 위한 제1과 제1장 이무영(1908~1960)의 /「인문평론」1호(1939.10) 사람은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꼭 그래야만 되는 필연적 이유도 이론도 없다. 가장 자연스런 인간의 성정이다. 굳이 얘기한다면 흙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것 빼고는 달리 인간의 회귀본능을 설명할 길이 없다. 특히 석회 반죽을 사이에 두고 흙과 결별해 사는 도시인들에게 보드라운 흙의 감촉은 그야말로 삶의 청량제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주말이면 맨발로 황톳길을 걷기도 하고 주말농장을 찾아 잊혀져 가는 흙내음을 되살리려 한다. 급기야 ‘귀농 열풍’이라는 현대판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직면해 있다. 이무영의 은 카프 계열의 농민문학과 이광수, 심훈 등의 계몽적 농민문학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다. 또 이무영 자신의 체험적 소설이기도 하다. 그..
이 남자가 애인 앞에서 줄행랑을 친 이유 [20세기 한국소설] 중 박영준의 『모범경작생』/「조선일보」(1934.1.10~1.23)/창비사 펴냄 일본 시찰에서 돌아온 길서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애인 의숙을 찾았다. 보지도 못했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을 바나나를 들고 밤이 으슥할 무렵 의숙을 찾았건만 길서를 본 의숙은 얼굴을 돌리고 울기만 했다. 의숙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아는 길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 성두가 충혈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길서는 애인 의숙이 보는 앞에서 들고 있던 바나나를 쥐고는 뒷문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남자로서, 애인으로서의 자존심까지 내팽개치고 왜 길서는 줄행랑을 쳐야만 했을까? 1934년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박영준의 소설 『모범경작생』은 관주도 농촌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가 ..
쥐불놀이, 도박 그리고 불륜 이기영의 /1933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던 30,40대 이상 성인이라면 누구나 쥐불놀이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설날 세뱃돈만큼이나 소중하게 모아두었던 빈 깡통도 보름 뒤에 있을 쥐불놀이를 위해서였다. 깡통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마른 풀이나 종이로 밑불을 놓아 불씨를 만든 다음 마른 장작을 빼곡히 채운다. 꺼지지나 않을까 깡통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너른 들판 한가운데로 모인다. 어느 틈엔가 들판은 쥐불을 하나씩 들고 나온 동네 아이들로 북적대기 시작한다. 누구의 신호랄 것도 없이 각자 크게 원을 그리며 쥐불을 돌리면 겨울 들녘은 온통 새빨갛게 불춤의 향연이 한판 벌어진다. 작가 이기영의 시선은 지금 이 쥐불놀이를 향하고 있다. 한데 난데없는 불빛이 그 산 밑으로 반짝이었다. 그것은 마치 땅 위로 ..
고향에는 슬픈 신작로가 있었다 현진건의 /1926년 우리네 길은 꼬불꼬불 지루함이 없다. 굽이돌아 해가 드는 모퉁이에는 느티나무를 그늘삼은 큼직한 돌멩이가 있어 나그네의 쉼터가 되었다. 불쑥 튀어나온 어릴 적 벗이 더없이 반가웠다. 모퉁이를 돌아 마주친 낯선 이와도 엷은 미소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이런 길이 어느 날 논을 가로지른 아지랑이 너머로 끝이 가물가물한 지루한 길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길을 ‘신작로’라 불렀다. 누구나 기억을 더듬어 찾아낸 고향에는 신작로 하나쯤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신작로를 60,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생겨난 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신작로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가 수탈한 식량을 원활하고 신속하게 운송하기 위해 우리네 꼬불꼬불했던 길을 쭉 잡아 늘어뜨린 길이 신작로였다. 신작로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