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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24 봄여름가을겨울, 그리움의 또다른 이름 (10)

김소월 시집/김소월/범우사 펴냄

 

바람 자는 이 저녁

흰 눈은 퍼붓는데

무엇하고 계시노

같은 저녁 금년은……

 

꿈이라도 꾸며는!

잠들면 만나련가.

잊었던 그 사람은

흰 눈 타고 오시네.

저녁때. 흰 눈은 퍼부어라.

-김소월의 '눈 오는 저녁' 중에서-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겨울보다는 여름이 낫다고들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춥고 배고픈 겨울보다야 발품이라도 팔면 배 곪을 일 없고, 별빛이 촘촘히 수놓인 밤하늘을 이불 삼아 어디에서고 누울 수 있는 계절이 여름이 아닌가! 겨울을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눈 오는 날 이층 베란다에서 바라본 폐지 줍는 노인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등이 굽어 몇 장 포갠 신문지 뭉치가 힘에 부쳐 보였다. 누군가에게는 콧노래 절로 나올 겨울을 왜 이리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것일까. 세상을 너무도 많이 알아버린 탓일지도…. 어릴 적 마음 설레며 기다리던 것이 첫 눈이었는데 말이다. 눈[雪]을 꼭 아이들만 기다리지는 않았나 보다. '흰 눈이 퍼부어라'고 노래하는 시인이 있었으니 말이다. 역시 시인의 상상력은 명불허전이다. 김소월의 시 '눈 오는 저녁'에서 시인은 잊었던 사람이 '흰 눈'을 타고 온단다. 얼마나 사무치고 애절한 기다림이면 임은 깃털보다 가벼운 눈을 타고 오는 것일까.

 

아마 우리나라 시인 중에 가곡이든 가요든 김소월만큼 노래로 만들어져 애창되는 시(詩)도 없을 것이다. '진달래꽃', '못 잊어',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먼 후일', '부모',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산유화', '초혼', '엄마야 누나야', '금잔디' 등 열 손가락으로 다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다. 유독 소월의 시가 노래로 많이 애창되는 것은 한국인만이 공유하는 가슴 한 구석에 멍울이 지도록 사무치는 한의 정서를 오롯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구상 어떤 언어로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는 단어가 한이라잖는가! 우리도 딱히 설명할라치면 말문이 막힌다. 그럼에도 누구나 가슴으로 알아차린 정서가 바로 한이 아닐까싶다. 오죽했으면 만물이 소생하는 봄에 누군가를 그리워 했을까.

 

어룰없이 지는 꽃은 가는 봄인데/어룰없이 오는 비에 봄은 울어라.

 

'어룰'은 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의 방언으로 '얼굴'을 뜻한다. 소월은 시 '봄 비'에서 '내 몸은 꽃자리에 주저앉아 우노라'며 봄 비에도 애틋한 그리움을 담아낸다. 

 

그래도 이유없이 들뜬 여름에는 기쁨을 노래하지 않았을까. 먹고 사는 걸로 치면 네 계절 중 그나마 여름이 가장 나으니 말이다. 다행히 소월은 여름이 들어간 시에서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그러나 필부필부의 즐거움을 노래했다면 소월답지(?) 않을 것이다. 

 

서늘하고 달 밝은 여름 밤이여/구름조차 희미한 여름 밤이여/

그지없이 거룩한 하늘로서는/젊음의 붉은 이슬 젖어 내려라.

 

소월의 시 '여름의 달밤'이다. 시인은 '여름보다도 여름 달밤보다 더 좋은 것이 인간의 이 세상에 다시 있으랴'며 '기쁨 가득한 여름 밤'을 노래한다. 하지만 '꿈 같은 즐거움의 눈물 흘러라'라는 마지막 구절에서는 비루한 현실에서 느끼는 지나간, 좋은 한 때의 그리움 때문이라는 것을 금새 알아차릴 수 있다. 여름날 어스레한 달밤 속에서 흘리는 '즐거움의 눈물'을 상상해 보시라. 마음 한 구석이 이보다 더 짠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마른 장작같은 감성을 지닌 필자도 가을만 되면 아니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뜻모를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죽어가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막연함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절정에 다다른 그리움과 한의 정서를 '나를 기르고 낳아준' 부모에게 투영시킨다.

 

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

 

시보다는 노래에 더 익숙한 소월의 대표 시 '부모'다. 무슨 해석이 필요할까싶다. 어쩌면 '가을 아침에'라는 시 속에 나타난 '그대의 가슴 속이 가볍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라며 끝없이 하염없이 울었던 시인은 세상의 모든 그리움을 '부모'라는 이름으로 응축시켰을지도 모른다.

 

범우사에서 펴낸 <김소월 시집>은 문고본이다. 한때 문고 읽기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독서를 둘러싼 갖가지 부담들을 덜어내고 읽을 수 있는 책이 문고였으니. 그러나 삶에 치이면서 시들해지기 시작한 독서 열기는 문고를 멀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새벽을 비추고 있는 풍경에서 문득 소월의 시를 떠올렸으니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며 읽을 수 있었던 문고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긴긴 겨울밤 머리맡에 시집 한 권 놓고 하앟게 밤을 새는 것도 겨울이 주는 소소한 낭만일 것이다. 잊었던 누군가를 그리워하면서. 잊혀져 가는 것들을 다시금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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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강여호 트랙백 0 :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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