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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불안과 위기를 조장하는 사회에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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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유리문/사키(Saki, 1870~1916, 버마)

 

한 소녀가 있었다. 베라라는 이름을 가진 이 소녀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짧은 순간에 이야기를 지어내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 열여섯 살에 불과했지만 순발력과 재치가 뛰어나 그 재능을 잘만 키운다면 장차 세계적인 소설가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소녀의 창작 능력과 입담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 청년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만들고 말았다. 사키의 소설 <열린 유리문>의 분위기는 학창 시절 들었던 어디에나 있었던 학교 괴담처럼 괴기스럽고 공포스럽다. 결국 소녀의 꾸며낸 이야기였다는 마지막 반전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누나의 소개로 새플턴 부인을 방문한 프램튼 너틀은 부인을 기다리는 동안 소녀로부터 이 집 특히 열린 유리문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다. 사연은 이랬다. 3년 전 오늘(10월 어느날) 새플턴 부인의 남편과 두 시동생은 도요새 사냥을 떠났다. 하지만 비가 지독하게 왔던 여름이 사냥을 나갔던 세 남자는 늪에 빠져 죽었고 여태 시신조차도 수습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느닷없는 비극에 슬픔에 빠지 새플턴 부인은 그들이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에 늘 유리문을 열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소녀는 단순히 입담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이야기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몸짓과 표정을 통해 프램턴을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세 남자가 열린 유리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으니 프램턴은 그야말로 심장이 멎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프램턴은 그야말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고 소녀는 프램턴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새플턴 가족에게 또 다시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있었다.

 

▲중국에서 입국한 북한 식당 종업원들 


프램턴 너틀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프램턴이 누나의 소개로 새플턴 부인을 찾아간 것도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는 우울증이 더 깊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우울증과 제목인 '열린 유리문'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열린 유리문'과 이에 얽힌 소녀의 꾸며낸 이야기는 세상과 소통이 절실한 주인공에게 보내는 대단한 역설이 아닐까 싶다. 사실 소녀의 꾸며낸 이야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헛점이 있었다. 오늘(10월)과 3년 전 오늘(여름)이 그것이다. 그러나 세상과의 접촉이 부족했던 주인공에게 한번 빠져든 공포와 불안은 합리적인 사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불안과 공포 또는 위기를 가장 적절히 이용하는 집단이 권력일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조작해낸 불안과 공포, 위기 앞에서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주입된 더 나아가 세뇌된 불안과 위기 앞에서 냉정함을 유지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굳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현 정권에서도 이런 권력의 속성은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 여론의 뭇매를 맞거나 지지율이 떨어질 때마다 '경제 위기론', '북핵 위기론'으로 여론의 반전을 꾀하곤 했다. 근거 없는 불안과 위기지만 이미 비판 능력을 상실한 언론의 도움으로 그때마다 권력의 위기를 넘어가곤 했다. 

 

▲유권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하는 새누리당 지도부와 국회의원 후보자들 


권력의 이런 행태는 이번 4.13총선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선거 전 마지막 주말을 앞둔 지난 8일 해외의 북한 식당에 근무하던 직원 13명이 집단 탈북해 7일 국내에 들어왔다고 공개 발표한 것이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북풍 논란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정부의 이번 발표가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탈북자의 북측에 남아있는 가족의 신변보호나 탈북자의 안전 등을 고려해 공공연한 비밀에 부쳐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탈북이 이루어진 단 하루만에 신속하게 발표한 것도 이런 의혹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1일에는 일부 언론을 통해 보도된 북한군 대좌와 북한 외교관 일가족의 탈북 사실도 공식 확인해 주는 등 이례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결국 북한 정권의 불안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부추기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북풍 조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이번 선거에서는 아니 최근 몇 번의 선거에서는 우스꽝스럽게(?) 하지만 톡톡히 효과를 본 불안과 위기 조장 행태를 경험할 수 있었다. 국회의원들이 느닷없이 아스팔트 위에 무릎을 꿇고 읍소하는 장면이다. 특히 집권 여당 지도부는 이번 선거에서도 뭔지는 모르지만 사죄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삭발까지 했다. 사죄를 했으면 분명 이유가 있을텐데 막무가내로 읍소하며 한번만 더 지지해달라고 한다. 지지자들에게 현재 위험하니 결집해 달라는 얘기겠지만 사실은 협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결과는 소설에서처럼 대반전으로 막을 내렸다. 어느 언론도 예상하지 못했던 여소야대는 물론 국회 제1당마저 제1야당이 차지한 것이다. 권력과 권력에 굴종한 언론은 '열린 유리문'이 상징하는 바 시민들의 소통 공간이 확대되고 있다는 현실을 간과한 것이다. 소통 공간의 확대로 합리적이고 냉철한 학습 효과가 그동안 반복됐던 '불안론'과 '위기론'을 이긴 것이다. 권력과 정치권이 시민들의 선택을 어떻게 반영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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