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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평화를 위한 전쟁? 국가의 잔인한 변명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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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루이지 피란델로(Luigi Pirandello, 1867~1936, 이탈리아)

 

터키 휴양지 보드룸 해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시리아 난민 관련 뉴스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게다가 그 난민이 세 살배기 아이였다는 사실은 전쟁의 참상을 그 무엇보다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또 한 명의 시리아 난민이 전세계인들을 향해 전쟁에 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호소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켈레티 역에서 독일행 기차를 기다리고 있던 열 세살의 시리아 난민 키난 마살메흐군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난민 신세로 세르비아, 헝가리, 마케도니아, 그리스를 전전하며 받았던 차별을 언급하며 시리아 사람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이어 키난 마살메흐군은 세계인들을 향해 전쟁을 멈추게 해주세요.라는 짧지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덧붙였다고 한다.

 

모든 전쟁은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승자나 패자 모두에게 참혹한 상처만을 남길 뿐이다. 평화를 위한 전쟁은 탐욕스런 국가의 악랄한 변명일 뿐이다. 지금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전쟁들도 평화라는 명분과 달리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처참함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은 소위 국민또는 시민이라 부르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마저 상실한 채 오직 국가만이 존재할 뿐이다.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 <전쟁>은 이런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본다.

 

▲사진>구글 검색

 

외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게 된 여인과 남편이 아들을 배웅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 부부는 자신들의 슬픔을 다른 승객들에게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처한 상황만 이야기할 뿐 이 부부에게는 어떤 위로도 되지 못한다. 특히 부부의 슬픔을 가장 냉철하게 분석하는 뚱뚱한 남자의 등장은 작가의 전쟁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스무 살이 된 아이들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는 걸까요?중략국가가 존재하고 또 그 국가가 굶어 죽지 않으려고 먹는 빵처럼 꼭 필요한 것이라면, 누군가가 그것을 지키러 가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스무 살이면 갑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눈물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죽더라도 열정적으로 행복하게 죽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우리는 모두 울음을 그쳐야 합니다. 모두 웃어야 합니다. 저처럼 말입니다.-<전쟁> 중에서-

 

뚱뚱한 남자는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은 행복하고 후회 없는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절대 슬퍼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최고의 방식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이므로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인공 여인 뿐만 아니라 기차 안의 모든 승객들은 아들의 죽음에 저토록 냉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감한 아버지를 치하한다. 전쟁터에서 죽은 자식의 죽음을 이렇게 냉철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뚱뚱한 남자의 이 냉철함도 사실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현실적인 상황 앞에서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아들이 정말로 죽었냐는 여인의 질문에 뚱뚱한 남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결국 전쟁이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의 아니 국가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그 뒤에 남는 것은 슬픔과 상처라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한다.

 

수많은 양심적 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아베 정권은 군국화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모양이다. 물론 아베 정권의 변명은 전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인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저 국가의 잔인한 변명일 뿐 세상에 평화를 위한 전쟁이나 군사적 재무장은 없다. 얼마 전 비무장지대 지뢰폭발사건을 두고 남북이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도 남과 북의 정부와 언론은 경쟁적으로 군대 자원이나 전역 연기 사례들을 보도함으로써 전쟁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마치 평화를 이야기하면 비겁한 국민이 되는 것처럼. 중국의 손자도 말했다.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평화를 지키기 위한 평화적인 노력보다는 평화를 명분으로 쉬 전쟁을 이야기하는 사회 분위기가 못내 아쉬운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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