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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국대 축구를 좋아하지 않을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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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실수/엘비라 린도(Elvira Lindo, 1962~, 스페인/1994

 

스페인 국민들의 축구 사랑은 유별나다. 특히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레알 마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라이벌 대결은 엘 클라시코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축구팬들까지 흥분시킨다. 메시와 호날두와 같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이 포진해 있는 이유도 있지만 엘 클라시코가 주목을 받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독립선포로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던 카탈루냐를 연고지로 하고 있다. FC 바르셀로나는 이런 카탈루냐인들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상대가 레알 마드리드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로마리우는 바르셀로나 선수야!

 

지금의 스페인은 과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라곤은 지금의 카탈루냐, 카스티야는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부 스페인에 해당한다. 하나의 국가로 합병됐음에도 불구하고 두 지역은 정치적, 문화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오랫동안 갈등과 반목을 거듭해 왔다. 게다가 20세기 들어 일어난 스페인 내전으로 두 지역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특히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총통이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억압하면서 카탈루냐 시민들의 독립 열망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카탈루냐를 기반으로 하는 FC 바르셀로나와 카스티야가 연고지인 레알 마드리드가 라이벌이자 앙숙이 된 이유가 단순히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만이었을까? 아니다.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압살했던 프랑코 총통이 레알 마드리드의 열성팬이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카탈루냐 시민들은 FC 바르셀로나를 통해 그들의 저항 정신과 독립 의지를 발산해 왔던 것이다.

 

 

 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가. 결국 카라반첼 알토 마을에 살면서 레알 마드리드 팀을 응원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입을 봉하고 살든지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게 나을 거라는 이야기다. 내가 만일 레알 마드리드 팬이 아니었더라면 그건 우리 가문의 수치일 것이고, 주먹 좀 쓰는 이하드는 내게 우격다짐을 할 게 분명하며, 아버지는 차마 고개를 들고 다닐 수조차 없을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중에서-

 

마놀리토 시리즈로 유명한 엘비라 린도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세계적인 명문 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이런 역사적 배경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카라반첼 알토 마을에 태어난 내가 레알 마드리드 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운명이자 숙명이다. 하지만 나는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런 내 심정을 내색할 수도 없다. 내 평생 가장 치명적인 실수, 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카라반첼 알토 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축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다.

 

~마리우 만세! 만세! 만세!”

 

카라반첼 알토 마을 사람들이 엘 트로페손 식당에 모여 레알 마드리드를 응원하던 날 레알 마드리드 팀이 네 번째 골을 성공시키자 나는 탁자 위로 올라가 가장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순간 식당 안은 정적에 휩싸였고 나는 도무지 이런 분위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하드 아버지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로마리우는 레알 마드리드가 아닌 FC 바르셀라나 선수였던 것이다. 마치 한·일전 축구 경기가 있던 날 붉은 악마 한 가운데서 일본 파이팅!’을 외친 꼴이다. 다행히 레알 마드리드 팀이 다섯 번째 골을 성공시켜 내가 받았던 정신적 고통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걱정이다. 월요일 아침이면 전교생이 나를 비웃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나를 위로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할아버지다.

 

구시대적인 애국심 강요

 

마놀리토, 걱정할 것 하나도 없다. 다음번 경기에는 토티야 도시락을 먹고 나랑 함께 구석 자리로 가자꾸나. 같이 한숨 늘어지게 자 버리는 거야. 아마 아무도 너를 쳐다보지 않을 거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 중에서-

 

 

아무리 스포츠 정신 운운하지만 경기 외적인 감성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세계적인 명문 프로축구팀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한·일전도 마찬가지다. ‘붉은 악마라는 이름으로 모든 국민은 축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투철한 애국자가 된다. 한·일전이 아니더라도 국가대표팀 경기는 해당 스포츠의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 정점이 바로 2002년 한·일 월드컵이었다. 전국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였으니 유사 이래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단 하나의 목적으로 거리를 채운 적은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흩어진 국민적 역량을 한 데 모으는 계기도 되었지만 지나친 집단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대표팀 경기만 있으면 모든 언론이 나서서 전 국민을 애국자로 만들기 위해 호들갑을 떤다. 평소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비인기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다. 경기 규칙도 모르지만 단지 국가대표팀 경기라는 이유만으로 전국은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기지 못하는 이런 집단주의는 점차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도 하고 권력자들에 의해 지배적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과거 권위시대에나 가능했던 일들이 21세기인 오늘날에 반복되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기 게양을 법으로 강제하겠다는 정부의 의도도 이런 분위기를 활용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집단적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태극기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정통성 없는 권력의 통치 수단일 뿐이었다.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국심을 강제할 수 있다는 발상이 실로 기가 찰 뿐이다.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아도 병역 회피로 점철된 그들보다 애국심이 덜 할까. 어쩌면 스포츠를 스포츠로 즐기지 못하는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놀리토의 할아버지처럼 열광의 도가니 한 구석에서 한숨 늘어지게 잘 수 있는 권리도 인정하는 사회 속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이 진짜 애국심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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