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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내 딸과 딸의 딸들을 위한 가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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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과 딸의 딸들을 위한 가슴 이야기/플로렌스 윌리엄스 지음/강석기 옮김/MID 펴냄

 

지난해 초 필자는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논문을 한 편 읽었다(학술지 <셀> 2013년 2월 14일자). 동아시아인에게 보이는 직모를 결정하는 유전자(EDAR)가 밝혀졌다는 내용으로, 동아시아인 대다수는 이 유전자의 변이체를 갖고 있다. EDAR 유전자는 엑토디스플라신 A 수용체 단백질을 만드는데 동아시아인의 경우 이 단백질의 370번째 아미노산이 발린(V)에서 알라닌(A)으로 바뀐 변이형(370A)이다.


이 수용체 단백질은 태아발생시 외배엽의 발달에 관여하는 신호전달 경로에 있으면서 피부, 머리카락, 손톱, 이, 땀샘 등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시아인 대다수가 지니고 있는 변이형은 신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그 결과 머리카락이 더 굵고 앞니가 삽처럼 생기게 됐다는 것.


연구자들은 이 변이 유전자를 쥐에 집어넣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즉 사람에서와 비슷하게 변이형(370A)인 쥐는 표준형(370V)인 쥐에 비해 털이 더 굵었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차이점들을 발견했는데, 변이형 쥐는 땀샘이 더 많았고 젖샘의 지방조직이 작아졌다. 연구자들은 이런 예상치 못한 차이점이 사람(중국인)에서도 존재하는지 확인해봤다. 그 결과 정말 370A 형인 사람들은 땀샘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편 변이형 쥐의 젖샘 지방조직이 작은 건 동아시아 여성의 가슴이 작은 것과 일맥상통하는 특징이다. 즉 동아시아 여인의 작은 가슴도 EDAR 유전자 변이의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연구자들은 동아시아에서 가슴이 작은 여성을 선호하는 것도 이런 변이형이 많은 이유가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국수공장에 널어놓은 국수처럼 축축 늘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성들이 정말 가슴도 작았던가 잠깐 회상하던 필자는 설사 그렇더라도 여성 가슴 크기에 대한 남성의 선호도가 동아시아 여성들의 겉모습에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는 추론이 다소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문득 ‘젖가슴 크기가 왜 이렇게 천차만별이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굳이 부피를 재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주변 여성들의 젖가슴 크기가 제각각인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젖가슴 크기가 짝을 선택하는데 중요한 요소라면 이 정도 편차가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동아시아 남성들이 가슴이 작은 여성을 선호하다는 건 근거가 있는 얘기일까.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유방확대술이 축소술보다 많을 텐데, 아무튼 설득력이 떨어져 보였다.


그런데 이해 봄 학술지 <네이처>에 실린 ‘새로 나온 페이퍼백’에서 저널리스트 플로렌스 윌리엄스가 쓴 <Breasts>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 책은 2012년 출간됐는데(하드커버), 당시 『네이처』에 서평까지 실렸다. 괜찮은 책이겠다 싶어 서평을 다운받아 읽어보니 어쩌면 몇 달 전 필자가 논문을 읽다가 갑자기 궁금해진 ‘젖가슴 크기의 커다란 편차’에 대한 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주문했다. 읽어보니 신기하게도 앞에 인용한 것처럼 저자 역시 이런 현상을 언급하는 구절이 있었다.


책에는 젖가슴에 대해 필자가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통찰이 곳곳에 보이는데 꽤 흥미로웠다. 먼저 젖가슴의 존재이유에 대한 필자의 평소 생각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됐다. 진화론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 즉 찰스 다윈의 신봉자들은 ‘성선택’이 ‘자연선택’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라고 말하며 사람에서 성선택의 예로 즐겨 언급하는 게 바로 여성의 젖가슴이다.


즉 인간에서 젖가슴은 수유 기관이라는 원래 목적을 넘어서, 직립을 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된 엉덩이를 대신한 기관으로 거듭났다는 것. 여성의 유방은 가슴에 달린 엉덩이란 말이다. 1967년 출간돼 이 분야의 명저로 알려진 데즈먼드 모리스의 책 <털 없는 원숭이>가 이런 관점을 널리 퍼뜨리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필자 역시 당연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자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헛소리일 뿐으로 오늘날 페미니스트 인류학자들 앞에서 젖가슴의 존재 이유가 남성이라고 말했다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골반 모형으로 머리를 얻어맞을 일’이라고 한다. 젖가슴은 어디까지나 직립한 인류가 수유를 최적화하기 위해 진화한 형태일 뿐이라는 것.


즉 직립과 뇌용량 증가로 목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게 태어난 아기는 엄마가 목을 받쳐줘야 하는데, 이때 젖꼭지가 축 처진 젖가슴에 달려 있어야 아기가 빨기 쉽다는 것. 또 턱이 퇴화하면서 얼굴이 편평해짐에 따라 젖가슴의 지방조직이 완충제 역할을 한다는 것. (갈비뼈를 덮은 살에 붙어있는 젖꼭지를 빨려다 코가 깨질 수 있다!) 결국 이런 목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방조직이 있으면 되기 때문에 굳이 정교한 조정이 필요하지 않았고, 따라서 개인에 따라 젖가슴의 크기는 다른 신체기관에 비해 편차가 크다는 말이다. 필자가 기대한 명쾌한 답은 아니지만 꽤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다.


남자들이 여성을 선택할 때 젖가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진화론적으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얘기라고 한다. 즉 이런 ‘판타지’는 문화적 편견으로, 여성이 신체를 숨기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만들어진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만 봐도 개화기에 서양선교사들이 여성들이 젖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모습을 특이하게 생각해 기록한 글과 사진이 남아 있다. 결국 수백 년에 불과한 이런 문화적 취향 변화에 인류의 ‘진화’를 끌어다 붙이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

젖가슴에 대한 필자의 두 번째 깨달음은 이 기관이 인체에서 가장 늦게 성숙하는 기관이라는 것. ‘사춘기를 지나면서 가슴이 솟아오르는 게 변화의 전부 아닌가’라고 생각했지만, 이는 겉모습만 젖가슴인 거고 실제 속을 들여다보면 목적에 맞는 기능, 즉 수유를 할 준비는 안 된 상태라고 한다. 여성은 임신을 하고 난 뒤에야 임신 호르몬의 영향 아래 젖을 만드는 새 구조를 성장시킨다고 한다.

 
윌리엄스는 책에서 “이유기가 되면, 다시 전환이 일어나 젖샘이 막히고 수축된다. 매 임신마다 젖가슴은 스스로를 만들고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 또 “임신한 적이 없는 여성일지라도, 젖가슴은 만약을 대비해 매달 미미하나마 조직화되고 느슨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월경주기 동안 젖가슴의 부피는 수분함량과 세포성장 정도에 따라 13.6% 정도 변한다고 한다. 젖가슴이 이렇게 동적인 기관, 즉 필요할 때 세포분열이 왕성하게 일어나야 하는 기관이다 보니 여성에게서 암이 잘 생기는 기관이기도 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90살이 될 때가지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이 8%라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 여성들의 젖가슴은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각종 화합물 때문인데, 그 결과 소녀들의 사춘기가 앞당겨지고 있고(극단적인 양상인 성조숙증도 늘고 있다) 유방암에 걸릴 위험성도 높아지고 있다. 윌리엄스가 이 책을 출간한 2012년은 DDT로 대표되는 화합물의 환경파괴를 경고한 레이첼 카슨의 명저 <침묵의 봄> 출간 50주년이 되는 해다. 따라서 본문의 상당 부분이 이 영역을 다루고 있다. <침묵의 봄>의 젖가슴 버전인 셈이다.


윌리엄스는 책에서 “카슨은 50년 전보다 지금 우리 식품과 개인 삶에 화합물이 더 많이 침투해있다는 사실에 분명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 화합물들이 어떻게 몸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과정에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커진데 대해서는 기뻐할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침묵의 봄>이 출간되고 18개월 뒤, 카슨은 56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유방암 환자였다”라고 덧붙였다. 올해는 카슨 사망 50주년이 되는 해다.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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