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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예술을 위해 딸을 실명시킨 아버지의 행위는 정당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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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동 나그네/이청준(1939~2008)/1979

 

우리나라 엄마들의 교육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가난이 대물림 되던 시절 그나마 교육은 신분 상승의 몇 안되는 기회였으니 교육에 올인하는 부모들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가 근대화와 산업화는 물론 정치 민주화를 서구 사회보다 짧은 시간 안에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불타는 교육열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분간 계층 이동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에도 여전히 교육은 한 가닥 희망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교육열이 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달리 요즘 부모들에게 교육열은 자식 사랑에 대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학교 교육 외에도 다른 부모들이 시키는 각종 과외 교습은 나도 똑같이 해야 한다.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내 아이에게 꼭 필요한 교육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남들이 하는만큼 해야 최소한 남들 수준으로 자식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어쩌면 부모들의 자기 만족일지도 모르지만 사회가 암묵적으로 조장하고 있는 병폐 아닌 병폐다. 심지어 설소대 수술을 하면 영어 발음이 좋아진다는 근거없는 소문만 믿고 자녀에게 설소대 절개 수술을 시키는 부모도 있다고 하니 자식 사랑이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한편 그릇된 자식 사랑으로 치면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이 아버지만큼 할까?

 

 

<선학동 나그네>는 <서편제>(1976), <소리의 빛>(1978)과 함께 이청준의 '남도 사람' 연작 소설 중 하나다. 세 편의 '남도 사람' 연작 소설은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의 원작이기도 하다. 소설은 기구한 삶을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다. 전국을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면서 오직 소리 하나만을 위해 신명을 바치는 아버지와 앞을 보지 못하는 딸, 그들을 버리고 떠났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누이를 찾아 헤매는 오라비. 이 가족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한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내는 그때 그런 몽롱한 심기 속에서 또 한 가지 기이한 광경을 보았다. 사내가 다시 눈을 들어 보았을 때, 길손의 모습이 사라지고 푸르름만 무심히 비껴 흐르고 있는 고갯마루 위로 언제부턴가 백학 한 마리가 문득 날개를 펴고 솟아올라 빈 하늘을 하염없이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선학동 나그네> 중에서-

 

소설 속 '선학동 나그네'는 누이의 흔적을 찾아 선학동을 찾은 사내이기도 하지만 선학동을 잠시 거쳐간 부녀이기도 하다. 선학동 포그에 물이 차오르면 석양 무렵 산 그림자가 물에 비쳐 학이 나는 것(비상학)처럼 보였지만 사내가 찾은 선학동은 옛날의 그 선학동이 아니었다. 사내는 이내 실망했지만 주막집 주인으로부터 선학동에 잠시 거쳐하다 홀연히 떠나버린 소리꾼 부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세월이 흐른 뒤 여인이 아비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다시 선학동을 찾았지만 자신을 찾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또 다시 선학동을 떠나고 말았다. 주막집 주인 이야기를 들은 사내는 한을 승화시키고 선학동을 떠난다.

 

 

저자는 애끓는 여인의 한이 판소리라는 예술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학이 날아 오르는 장면으로 묘사한 것이다. 즉 한이 예술로 승화되어 '비상학'이 되었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세속에 찌들어 사는 부녀였지만 뭇 사람들과는 달리 이 부녀는 그들의 한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선학동 뒷산 관음봉이 물을 타고 한 마리 비상학으로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할 때면, 노인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거나 없거나 그 비상학을 벗 삼아 혼자 소리를 시작하곤 했어요. 해 질 녘 포구에 물이 차오르고 부녀가 그 비상학과 더불어 소리를 시작하면 선학이 소리를 불러낸 것인지, 소리가 선학을 날게 한 것인지 분간을 짓기가 어려운 지경이었지요. -<선학동 나그네> 중에서-

 

한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경이로운 장면이기도 하다. 소리꾼 부녀가 만들어 내는 장면은 신비하고 환성적이기까지 하다. 이처럼 아름답게 한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가가 또 있을까 싶다. 마치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경이로운 순간을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이토록 아름다운 소설에 애써 딴지를 걸려 하는 것은 평생 소리 하나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아비의 예술적 욕망이 과연 옳았나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 때문이다. <서편제>를 비롯해 '남도 사람' 연작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누구나 품었을 의문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랬지요. 내가 여태 그걸 말하지 않고 있었던가? 그 여잔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다오. 그래 그 노인이 여자의 앞을 인도하고 다니면서 손발 노릇을 대신해 줬지요." -<선학동 나그네> 중에서-

 

소리에 미친 소리꾼 아버지가 딸의 목소리에 한을 실어 진정한 소리꾼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문학과 예술이 아니었다면 이보다 더 엽기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딸은 이런 아버지의 행위를 원망하지 않았다니 가슴이 더 메어지는 듯 하다. 과연 예술을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의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솔직히 따지면 소리꾼 아비는 한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 아니다. 예술을 위해 딸에게 한을 심어준 것이다. 아비의 애끓는 자식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한의 승화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는 않았을까? 아버지의 이런 행위는 분명 끔찍한 아동 학대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요즘 부모들의 자식 사랑도 <선학동 나그네>를 통해 한번쯤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 교육에 올인하는 부모들의 행동이 진정 자식 사랑의 표현일지 아니면 자식을 통해 대신 성취하려는 부모의 욕심과 욕망은 아닐지 말이다. <사진=영화 '천년학',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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