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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한글날에 읽는 우리말 동시, 한글이 이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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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타는 날/강순예/국립국어원 소식지 『쉼표, 마침표』10월호

 

저녁 출근길, 음산한 분위기에 아무 생각없이 하늘을 쳐다보니 달이 여인네 눈썹만큼의 형체만 남긴 채 시나브로 검은 그림자 뒤로 숨고 있었다. '참, 오늘 3년 만에 개기월식을 볼 수 있다고 했지!.' 문득 며칠 전 본 뉴스가 스쳐갔다. 그러고 보니 사십 년 넘게 살면서 지구가 달과 태양 사이에 위치해 지구 그림자가 달을 가린다는 월식 현상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린아이마냥 신기한 듯 밤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데 둥그렇게 빛으로 형체만 유지한 달은 나보다 더 서둘러 자꾸만 도망치듯 저만치 앞서 있었다. 어릴 적 읽었던 동시에도 이런 표현이 있었는데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개를 끄덕이다니 척박하디 척박한 내 감성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태어나 처음으로 본 신기한(?) 장면을 뒤로 하고 여느 밤과 마찬가지로 지게차 소리 요란한 일터를 하얗게 지새웠다. 

 

새벽 퇴근길 달은 어제 새벽 퇴근하면서 보던 그 달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가을 밤 하늘에 서럽도록 차가운 빛을 연신 뿜어내고 있었다. 어제 저녁처럼 다시금 빠른 걸음으로 쫓아봤더니 역시나 달은 나보다 더 빨리 밤 하늘을 유영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새벽이라 다행이지 오가는 사람들이라도 있었으면 민망할 뻔 했다. 괜시리 멋쩍게 웃음이 나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습관처럼 컴퓨터를 켜고 개기월식을 검색해 보고는 자주 방문하는 사이트에서 달에 관한 동시 하나를 발견했다.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어제 저녁부터 오늘 새벽까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동심의 세계를 만끽하고 있으니 말이다. 읽어도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우리말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한심하다. 참, 오늘이 한글날이다.  

 

 

흥부네 초가지붕에/별꽃처럼 환히 웃던 박꽃

 

제비 다리 고쳐 주고 받은 박씨가/해 안고 달 품어/당글당글 당그르르/둥글둥글 둥그르르 영글었네!

 

한 번 보고 침만 꼴깍/두 번 보기 아까웠을 하얀 달

 

오늘은 무슨 날?/흥부네 박타는 날

 

동네방네 고샅고샅/올망졸망 아이들아 모두 모여라/물동이 내려놓고 콩쥐도 오너라/살랑살랑 강아지야 꼬리 흔들며/들랑대는 도둑 쥐야 너도 오너라

 

이 박을 얼른 타서/보글보글 박죽을 끓여 먹을까/쿵덕쿵덕 박떡을 쪄서 먹을까/조물조물 박나물 무쳐 먹을까

 

살근살근 박을 타세/슬근슬근 톱질 하세/왁실덕실 왁자그르르/온 마을 당실당실 잔치를 여네

-'강순예의 동시 '달 타는 날' 중에서'-

 

어릴 적 누구나 읽었을 <흥부전>에서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 주고 받은 씨앗을 심어 탐스럽게 영근 박을 타는 흥겨운 풍경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박 속에서는 금은보화가 나왔었지. 하지만 그 장면까지 갔다면 어지간히 멋없는 동시가 되었을 것이다. 영근 박이 하얀 달처럼 초가지붕에 매달려 있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세상에 달이 하나라는 사실은 진리(?)가 아니었나보다! 온동네 잔치가 된 흥부네 박타는 날에 우리네 민초들의 소박한 꿈이 영글어 가는 듯 하다. 계모에게 시달리던 콩쥐도 초대했고, 하얀 눈만 좋아한 줄 알았던 강아지도 초대했다. 미움만 받던 도둑 쥐도 기꺼이 초대했다. 

 

우리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의태어(당글당글, 둥글둥글, 올망졸망, 살랑살랑, 조물조물, 살근살근)와 의성어(보글보글, 쿵덕쿵덕, 왁실덕실)의 적절한 나열이 잔치 분위기를 한껏 돋우고 있다. 부끄럽게도 낯선 우리말도 적지 않다. 아니 외래어와 외계어의 남발로 자주 쓰지 않다보니 잊혀져 가는 표현들일 것이다. 왁실덕실은 많은 사람이나 동물이 어지럽게 뒤섞여 몹시 붐비는 모양을 나타내는 '왁시글덕시글'의 준말이란다. 작고 둥근 것이 단단하고 탄력 있는 모양을 나타내는 '당글당글'도 낯익은 듯 낯선 표현이다. 물체가 서로 맞닿아 가볍게 스치며 자꾸 비벼지는 모양을 표현한 '살근살근', '슬근슬근'도 박 타는 풍경을 더 실감나게 만든다. 한글날 아침이라 그런지 우리말이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평소에는 잘 몰랐던 게 부끄러워진다.

 

동시 하나를 이렇게 자주 읽고 또 읽은 적은 없었다. 읽을수록 감칠 맛이 나니 어쩔 수 없다. 아름답지만 생소한 표현들을 중얼중얼 하며 언제나 아침처럼 조간신문을 펼쳐본다. 노벨상 계절이 돌아왔나보다. 올해 노벨 화학상은 또 일본 과학자들이 수상했다고 한다. 내가 아는 바로만 벌써 몇 번짼가 싶다. 이런게 바로 거품경제를 이겨낸 일본의 저력인가 싶기도 하다. 별안간 잡스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토록 아름다운 우리말을 외국어로 제대로 번역이나 할 수 있을까? 노벨상 관계자들이 우리말, 한글을 알았다면 한국인 출신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한 둘이 아니었을텐데.....저 산을 넘어간 달이 지구 반대편에 다시 떠올라서 올망졸망 모여있을 그들에게 왁시글덕시글한 달 타는 풍경을 소곤소곤 읊어주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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