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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세계명작단편소설

이 남자의 코가 계륵이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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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 일본)/1916년

 

후한의 승상 조조는 한중 땅을 차지하기 위해 촉과 치열한 전쟁을 벌였지만 진척이 없자 진퇴를 놓고 고민했다. 부하 장수가 암호를 정해달라고 하자 조조는 '계륵'이라고 정해주었다. 부하 중 양수만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퇴각을 준비했다. 양수가 알아차린 조조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조조는 한중 땅이 포기하기는 아깝지만 그렇다고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차지할만큼 대단한 땅이 아니었던 것이다. 양수는 '계륵'에서 조조의 이런 속마음을 알아낸 것이다. '계륵'은 '닭의 갈비'를 말한다. 먹을 것도 없어 그냥 버리자니 갈비 사이에 붙은 살이 있어 아까운 것이 바로 '계륵'이다. 조조에게는 한중 땅이 바로 '계륵'이었던 것이다. 이런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챈 양수야말로 현명한 부하의 표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양수는 조조에 의해 참수당하는 불운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계륵'의 유래를 이렇듯 구구절절 설명하는 데는 자신의 신체 기관 중 하나를 계륵 쯤으로 여기는 한 남자가 있어서다.

 

이 남자의 코가 계륵이 된 사연

 

신체 기관 중에 버려도 될만큼 쓸모없는 부분이 어디 있겠냐마는 '젠치 나이구(젠치는 사람 이름이고, 나이구는 스님의 관직명이다)'라는 이 남자에게 코는 '계륵'보다 더한 고민거리였다. 도대체 이 남자의 코가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나는 '계륵' 운운하는 것일까?

 

젠치 나이구의 코로 말하자면, 이케노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길이는 대여섯 치나 되고 윗입술 위에서부터 턱 밑까지 늘어져 있다. 모양은 위나 끝이나 한결같이 굵다. 말하자면 가늘고 긴 소시지 같은 것이 흐늘흐늘 얼굴 한가운데서 축 늘어져 있는 것이다. -<코> 중에서-

 

▲사진> 야후재팬 

 

흡사 위 그림과 같은 모양이었으리라. 매부리코 수준만 됐어도 젠치는 이렇듯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코>는 한 남자의 코에 얽힌 이야기다. 젠치에게 소시지 같은 코는 고민을 넘어 두려움이었다. 첫째는 실제로 코가 긴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밥을 먹으려면 코끝이 밥그릇 속의 밥에 닿았고 남과 밥상을 같이 할 때는 판자로 코를 받쳐야 할 정도였다. 또 하나는 코로 인해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명색이 출가한 스님인데 코 때문에 뭇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니 젠치가 받았을 자존심의 상처는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서 젠치는 코 때문에 훼손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즉 남들과는 사뭇 다른 자신의 코를 정상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자신과 같은 코를 발견하기 위해 사람들의 얼굴을 끈기있게 관찰하기도 했다. 혹시라도 자신과 같은 코를 가진 사람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나마 안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새의 발톱을 삶아서 마셔보기도 했고, 쥐 오줌을 받아다가 코끝에 발라보기도 했지만 코는 여전히 대여섯 치나 되는 길이로 입술 위에 축 늘어져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제자 중에 한 명이 긴 코를 짧게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는 말에 젠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방밥을 당장 시도해 보았다. 그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뜨거운 물로 코를 지지고 그 코를 다른 사람에게 짓밟게 한다는 극히 간단한 치료법이었다. 젠치는 알려준 대로 실행했고 아니나 다를까 턱 아래까지 축 늘어져 있던 코는 거짓말처럼 줄어 들어서 옛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코가 되었다. 드디어 젠치는 코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행복하게 되었을까?

 

우선은 불안했다. 또다시 코가 길어지지 않을까 해서. 그래서 코끝을 자꾸 만져 보기도 했지만 코는 여전히 짧았다. 젠치는 자유롭고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삼 일이 지나면서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소시지 같은 코를 비웃던 사람들이 정상적인 코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킬킬대며 웃어댄 것이었다. 같은 웃음이지만 그 웃음 속에는 코가 길었던 때와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친절하게도 저자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자기를 잃어버린 슬픈 현대인의 자화상

 

인간의 마음에는 서로 모순된 두 개의 감정이 있다. 물론 누구라도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그 불행을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게 되면, 이번에는 이쪽에서 왠지 부족한 듯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한 번 더 그 사람을 똑같은 불행에 빠뜨리고 싶은 그런 기분마저 들게 된다. 그렇게 어느 사이엔가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적의를 그 사람에 대해 품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이구가 이유를 모르면서도 왠지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이케노오의 승속들의 태도에서 분명 이 방관자의 이기주의를 넌지시 깨달았던 때문이다. -<코> 중에서-

 

'방관자의 이기주의'란 무엇일까? 어쩌면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우리 속담과도 통하지 않을까 싶다. 갑자기 짧아진 코를 두고 갖가지 억측이 난무했고, 그 억측은 코가 길었던 때보다 더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사람들의 또 다른 웃음 때문이었는지 젠치는 자신의 코에 뭔가 병이 생겼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즈금 느닷없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할 즈음 다시 윗입술 위에서 턱 아래까지 대여섯치 넘게 매달려 있는 옛날의 코가 되었다. 젠치는 어디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코가 짧아졌던 때와 같은 명랑한 마음이 느껴졌다. 소설은 예전의 코로 돌아간 젠치가 "이렇게 되면 분명히 이제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리면서 끝을 맺는다. 과연 젠치의 코를 비웃는 사람들은 없어졌을까? 그래서 젠치는 코 때문에 상실된 자존심도 회복하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을까? 글쎄. '방관자의 이기주의'란 저자의 말이 윙윙 거리는 벌마냥 귓가를 맴돈다.

 

요즘 우리나라를 두고 해외 언론에서는 '성형천국'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고 한다. '성형관광'까지 온다고 하니 우리나라 성형술이 외국에 비해 뛰어난 것만은 사실이지 싶다. 그렇다고 '성형천국'이라는 말이 뛰어난 의학기술을 부러워하는 말만은 아닐 것이다. 한 때 성형이 부정적으로 비춰진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방학을 이용해 성형수술을 할만큼 대중화 되었다. 그야말로 성형열풍이다. 성형열풍이 단순히 아름다워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만을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성형천국'이니 '성형열풍'이니 하는 말들은 최근 외모지상주의에 빠진 우리사회의 자화상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녀 관계는 물론 취업에서도 그 사람의 됨됨이나 능력보다는 얼마나 '예쁘고' '잘 생겼느냐'가 기준이 되다보니 너나 할것없이 성형을 성장 과정에서 꼭 거쳐야 할 단계로 인식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상업적인 대중매체가 이런 현상을 부추기고는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의 성형열풍을 시대적 변화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어쩌면 사회가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기를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코에 얽힌 유머러스한 설화를 소설로 다시 쓴 것도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시선에 의해 자기를 잃어버린 슬픈 근대인의 자화상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은 아닐까? 비록 소설이 근대 일본의 풍경을 고발한 내용이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내면의 아름다움보다는 드러난 아름다움에만 열광하는 요즘 우리사회가 오버랩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씁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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