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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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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권하는 사회/현진건(1900~1940)/1921년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절어 사는 남자가 있었다. 술만 취하면 파출소를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난동까지야 아니었지만 인사불성이 된 남자는 이런저런 하소연을 구구절절 늘어놓고는 으레 한마디씩 외치곤 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독설 같았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맨정신인 사람들은 정신이 반쯤은 나갔을 남자의 이 한마디에 열광했고 환호했다. 한때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2TV 개그 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의 한 장면이다. 비록 곤드레만드레 취한 남자의 주정이었지만 시청자들은 이 한마디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리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열렬한 관심과 달리 이 코너는 어느 날 개그 콘서트에서 빠지고 말았다. 방송국 측에서는 인기 하락으로 인한 자연스런 하차였다고 주장했지만 시청자들은 외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코너가 하차되기 얼마 전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있었던 발언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이었던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한선교 의원은 KBS 김인규 사장에게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가장 찝찝한 부분이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대사 내용"이라며 "어떻게 김사장이 취임했는데도 계속 이 프로그램에서 그런 대사가 나오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발언이 있자마자 얼만 안 있어 코너가 폐지되었으니 시청자들이 외압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사진>KBS 2TV 개그 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어느 주정뱅이 남자의 밑도 끝도 없는 독설에 열광했으며, 왜 권력은 일개 예능 프로그램의 짧은 한 코너에 불과했던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을까? 답은 간단하고 자명하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술에라도 취하지 않으면 절대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비루한 현실 때문일 것이다. 주정뱅이 남자였지만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독설을 퍼부을 때만은 멀쩡한 눈으로 TV 밖 누군가를 노려보는 듯 했으니 당시 권력이 움찔 했을 수 밖에.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그 때보다 얼마나 더 나아졌을까?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코너 속 주정뱅이 남자의 독설을 그때보다 더 간절하게 염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읽어본 독자라면 이 소설이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의 모티브였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술 권하는 사회'와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에서 언어적 동질감 뿐만 아니라 묘한 정서적 공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술 푸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일까?

 

1921년에 발표된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의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대강 이렇다. 바느질하던 아내는 바늘에 찔러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자 화가 치밀어 오른다. 새벽 1시가 넘었는데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동경 유학생이었던 남편은 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왔지만 변변한 돈벌이도 없이 허구헌날 술만 마시며 돌아다닌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남편은 만취가 되어 돌아왔다. 아내는 남편에게 술을 권하는 사람들을 원망한다. 아내의 원망에 남편은 사회가 자신의 머리를 마비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하므로 술을 마신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의 말이 이해될 리 없다. 이런 아내를 답답해 하며 남편은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을 나간다. 소설은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하고 절망한 어조로 소곤거리는 아내의 말로 막을 내린다. 

 

"흥, 또 못 알아듣는군. 묻는 내가 그르지. 마누라야 그런 말을 알 수 있겠소. 내가 설명해 드리지. 자세히 들어요. 내게 술을 권하는 것은 화증도 아니고 하이칼라도 아니요,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 났더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술 권하는 사회> 중에서- 

 

소설 속 남편은 왜 술주정꾼이 되었을까? 당시로서는 드물게 유학까지 다녀왔지만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제적 능력도 없이 하루하루 술에 취해 살아가는 남편의 무기력함에는 시대적 아픔이 짙게 깔려 있다. 지식인으로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서려고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 앞에 번번히 좌절되고 만다. 남편이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것인지, 적응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식민 치하의 구조적 모순은 남편을 끝없는 무기력의 세계로 이끌고 술은 이렇듯 무기력한 지식인이 보여주는 좌절과 상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물정 모르고 순진하기만 한 아내에게 답답함을 느끼며 핀잔을 주는 남편의 모습에서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그릇된 권위주의가 보여 내심 불편하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술 권하는 사회'에서 다시 오늘날 '술 푸게 하는 사회'로 돌아오자. 현실의 무기력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이는 비단 일제 강점기 어느 지식인만은 아니다. 민주주의의 꽃이 만개했다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필부필부들은 다 행복할까? 희망이 넘치는 미래를 물려주기 위해 희망 없는 현실에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이 시대 소시민들은 취하지 않을 행복한 술을 마시고 있을까?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국가 기관을 동원해 정권을 잡고도 단 한마디 사과도 없는 권력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서민을 상전 모시듯 하겠다더니 어느날 돌변해서 상전 행세를 하는 샌님들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자식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진실 규명마저 외면당하고 있는 부모들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군대 간 아들이 윤일병이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부모들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도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자들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자신보다 몇 배는 커보이는 폐지 리어카를 힘겹게 끄는 할머니들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때 되면 나오는 권력의 경제위기론을 앵무새처럼 지저귀고 있는 언론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자신들의 꿈보다는 부모들의 꿈을 쫓아 잠 자는 시간마저 빼앗겨버린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지를 알면서도 분노하는 법을 잊어버린 나 자신을 보고 있자니 슬퍼서 술을 푼다.

 

하지만 가장 슬픈 것은 이렇듯 비루한 현실 속에서도 누구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누구보다 더 묵묵하게 견대내고 있는 이 시대 소시민들의 반쯤은 굽어 보이는 뒷모습이다. 그래서 또 묻는다. 

 

누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누가 우리를 술 푸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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