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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년은 사랑했고 아팠다. 그리고 어른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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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황순원/1953년

 

어릴 적 살던 동네에 큰 방죽이 하나 있었다. 가을이면 여름내 논에 물을 대느라 바닥이 훤히 드러났다. 맨살을 드러낸 방죽 바닥은 온통 미꾸라지 천지였다. 뻘같은 흙을 한 움쿰 걷어 올리면 미꾸라지 반 흙 반이었다. 어른 손바닥보다 큰 붕어들도 얼마 남지않은 물 속에서 연신 지느러미를 파닥거렸다. 이 때는 낚시대와 그물이 없어도 모두 능숙한 어부였다. 그렇게 놀다보면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메아리처럼 들릴 듯 말 듯 엄마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방죽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여름에 있었다. 학교를 파하자마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방죽으로 뛰어들었다. 여자애들이 보든말든 상관없었다. 방죽 턱을 붙들고 지칠 때까지 물장구를 쳤고 발 끝이 닿는 곳까지 개가 헤엄치듯 왔다갔다 했다. 

 

▲KBS TV문학관 '소나기' 중에서

 

하지만 늘 부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기껏 방죽 가장자리만 맴도는 내 또래와 달리 방죽 가운데까지 수영해 가서 노는 동네 형들이었다. 벌거숭이인 내 또래와 달리 그네들은 팬티도 걸쳤고 게 중에는 도회지 친척이 지난 여름 방학 때 사다준 수영복도 입고 있었다. 방죽에는 같이 가지만 정작 물놀이 할 때는 따로 놀았다. 항상 부러웠다. 우리도 그네들의 세계에 합류하고 싶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그렇다고 기회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네들은 내 또래들을 한명씩 발 끝이 달랑말랑 한 곳까지 까만 튜브에 태우고 가서는 갑자기 튜브를 뒤집었다. 다소 위험한 장난이긴 했지만 그네들은 허우적대는 우리 주변을 지켰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방죽 가장자리로 헤엄쳐 가는 것이었다. 성공하면 다음에 방죽에 갈 때부터는 우리도 그네들과 한 패가 되어 놀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동네 꼬맹이를 벗어나고 있었다.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KBS TV문학관 '소나기' 중에서

 

한국 성인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황순원의 <소나기>가 아닐까 싶다. 교과서와 TV에 자주 소개되었던 탓도 있지만 누구나 풋풋했던 첫사랑의 설레임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에 알퐁스 도데의 <별>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황순원의 <소나기>가 있다고 할 정도로 간결한 문체와 심리 묘사로 풋사랑의 추억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 추정되는 소년이 소녀를 업고 개울을 건너는 장면이나 소나기를 피해 오두막에서 소년이 소녀의 생채기에 송진을 발라주는 장면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서 떠올리고 싶은 첫사랑의 설레임이 딱 여기까지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소설의 결말은 소녀가 죽는 것이었다. 작가는 왜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에서 이런 비극적 결말을 끼워넣었을까?

 

▲KBS TV문학관 '소나기' 중에서 

 

다음 날부터 좀 더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의 그림자가 뵈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소년의 가슴 한구석에는 어딘가 허전함이 자리잡는 것이었다. 주머니 속 조약돌을 주무르는 버릇이 생겼다. -<소나기> 중에서-

 

전에 없이 소녀의 까만 눈에 쓸쓸한 빛이 떠돌았다. 소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소년은 혼잣속으로 소녀가 이사를 간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어 보았다. 무어 그리 안타까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그렇건만 소년은 지금 자기가 씹고 있는 대추알(소녀가 준)의 단맛을 모르고 있었다. -<소나기> 중에서-

 

▲KBS TV문학관 '소나기' 중에서 

 

성장기 첫사랑은 한바탕 퍼붓고는 금새 사라지는 소나기와 같다. 비단 소년과 소녀의 짧은 만남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금새 또 다른 누군가를 보고 심장이 뛸지도 모른다. 그 시절의 사랑을 덜 여물었다고 풋사랑이라고도 하지만 아직 세상을 모르기에 어른들 세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그들만의 풋풋함이 있다. 그렇다고 설레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과 이별, 행복과 아픔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혼돈의 시기이기도 하다. 소녀의 죽음으로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짧은 만남으로 끝났다. 소설에는 없지만 소년은 밤새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으리라. 통과의례란 이렇게 깊은 마음의 생채기를 남긴다. 소년은 사랑도 했고 이별도 했다. 그리고 소년은 어른이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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