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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유일한 한국 호랑이가 유리관에 갇힌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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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엔도 키미오 지음/이은옥 옮김/이담북스 펴냄/2009

 

메이지 40(1907) 1,2월 무렵이었다. 한 마리의 호랑이를 짊어진 조선인들이 목포로 와서 살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리에[入江] 운송점 사장이 호랑이를 살 생각으로 교섭과 상담을 해 드디어 구매를 결정했다. 그 기념으로 모두들 기념촬영을 하려고 하자, 경찰이 오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며 기념촬영이 중단되었다. 전화상으로 무슨 일인가 이유를 물어보자

“이 호랑이는 명찰 불갑사로 이름 높은 영광군의 불갑산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덫으로 잡은 것이나, 화약 사용의 혐의가 있다. 따라서 잡은 본인들의 자유처분에 맡길 수 없으니 아무쪼록 영광경찰서로 반송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

<중략> 그래서 수차례 회의를 한 끝에 드디어 경매의 수속을 마쳤다. 개표해 보니 그 여행객은 백 원에 입찰을, 목포부의 모 씨가 200원에 입찰하고 있어서 일단 목포에서 호랑이가 유출되는 것약 200원으로 박제를 의뢰해 지금의 소학교의 일실에 위풍당당하게 놓이게 되었다. 이 호랑이는 포획 이후 여러 시간이 흘러 부패의 우려도 있고 영광으로 보내는 시간이 없어서 소학교로 기증하자는 임기 조치로서 마츠이 서장이 목포에서 처분한 것이었다. 과연 맹호 한 마리이다. 쓰러져서도 좀처럼 극락왕생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목포부사> 쇼와 5(1930)여담일속중에서-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박제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 사진>뉴시스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기록이다. 현재 유일한 한국 호랑이는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박제 형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문헌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졌을 뿐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였다. 구전이다보니 전하는 사람에 따라 포획 시기와 기증 연도 등이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상황과 관련된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또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각자의 시각에서 기억하다 보니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대한 통일된 정보가 없다시피 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일한 한국 호랑이는 박제 형태로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고

마지막 한국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 

 

▲엔도 키미오의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마지막 한국 호랑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과 한국 호랑이 멸종의 진실을 밝힌 책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의 저자는 일본인 엔도 키미오다. 그는 한국 유력지의 오보만을 믿고 무작정 한국을 방문한 뒤 몇 년에 걸쳐 한국 호랑이 관계자와 자료를 뒤져 르포 형식의 이 책을 출간했다. 그가 한국 호랑이를 취재하면서 내린 결론은 현재 한국에는 최소한 남한에는 한국 호랑이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유일한 한국 호랑이가 박제 형태로나마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과 마지막 한국 호랑이가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마지막 한국 호랑이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었다. 엔도 키미오에 의해 한국 호랑이에 관한 역사가 비로소 정리된 것이다.

 

엔도 키미오는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의 정확한 포획 시기를 밝히기 위해 목포와 서울,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했다. 책이 마치 목포 근대사처럼 보이는 것도 그만큼 당시 포획되어 박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자료가 부실하다는 반증이었다. 엔도 키미오는 닥치는 대로 목포 개항 초기의 자료를 수집했다. 급기야 목포시립도서관(개항 당시 일본 영사관 자리)에서 1930년에 씌여진 <목포부사>라는 책을 찾아내고 그 안에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자료가 있음을 확인했다. <목포부사>에 따르면 유일한 한국 호랑이가 포획되어 박제 형태로 보존된 시기는 기존에 알려진 1911년이 아니라 1907년이었다. 1907년 영광 불갑사에서 잡혀 히라구치 쇼지로라는 일본인이 경매를 통해 산 뒤 박제해서 1908년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목포유달초등학교에 기증한 것이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마지막 한국 호랑이.  

 

엔도 키미오가 밝혀낸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마지막 한국 호랑이의 포획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해 냈다. 그는 서울대 도서관에서 총독부 발행 국어 독본(일제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대덕산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내고 당시 실제 상황과 많이 다르게 기술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대덕산 호랑이의 공격을 받았다는 김유근 할아버지를 비롯해 생존해 있는 관련자들을 직접 취재한 결과 당시 총독부 발행 교과서에 실린 대덕산 호랑이 이야기는 일젝 호랑이 포획을 이용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호랑이의 멸종은 일제의 해수구제정책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호랑이는 왜 멸종했을까? 엔도 키미오는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는 마지막 한국 호랑이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들은 증언과 직접 찾아낸 고문서를 통해 일제의 해수구제정책이 한국 호랑이를 멸종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찾아낸 문서는 <조선휘보>와 월간지 『조선』1926 1월호에 실린 호랑이와 조선이었다 

 

▲목포 다다미상 하라구치 쇼지로씨가 구입한  호랑이 가죽. 1914년

 

일제는 1910~1920년대를 걸쳐 주민이나 가축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 표범, , 늑대 등의 해수(해로운 짐승)’을 구제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휘보>에 따르면 호랑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1915 8, 1916년에는 4명이었다. 가축 피해는 이보다 많은 각각 565마리, 576마리였다. 특히 늑대 피해로는 1915년에는 113명이 사망했고, 1916년에는 54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피해 신고를 받으면 주민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야생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거나 사살하기 시작했다 

 

▲민화 속 호랑이. 사진>서울신문 

 

일제는 1915년과 1916년에 걸쳐 24마리의 호랑이를 포획했다. 또 월간지 『조선』1월호 호랑이와 조선에는 1919년과 1924년 사이에 호랑이가 33마리, 표범이 88마리나 포획된 것으로 실려있다. 이후에도 호랑이 구제 수는 1934 1마리, 1937 3마리, 1938 1마리, 1940 1마리 등 급격히 호랑이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1933년 이후에는 북한 지역으로 이 당시에 이미 남한 지역에는 호랑이가 멸종됐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도 남한 지역에서 해수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그 때까지도 한국 호랑이가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호랑이 피해가 잦아서 대대적인 호랑이 포획정책이 있어왔다. 일제의 해수구제정책이 아니었더라도 한국 호랑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기도 하다. 

 

호랑이는 우리나라 민담이나 민화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맹수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호랑이가 신성시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호랑이 멸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마지막 한국 호랑이에 관한 진실이 한 일본인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 호랑이의 흔적은 극동 러시아에 있는 아무르 호랑이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한국 호랑이 멸종의 진실을 일본인이 밝혀냈다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한국 호랑이 보호와 보존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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