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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의 큰크리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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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인 숭배 신드롬(Celebrity Worship Syndrom)이라는 용어가 있다. 스포츠 스타, 연예인 등 유명인에게 과도하게 집착한 나머지 범죄까지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유명인 숭배 신드롬의 증상으로는 범죄는 물론 좋아하는 유명인이 사용했던 물건 수집에 집착하거나 무의식적으로 하루종일 유명인을 생각하는 행위 등이다. 2009 최진실 유골을 훔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범인도 최진실이 꿈속에 나타나 무덤을 옮겨달라고 진술하는 등 유명인 숭배 신드롬증상을 보이기도 했다.

 

록의 황제엘비스 프레슬리도 유명인 숭배 신드롬때문에 죽어서도 수난을 당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한 1977내셔널 인쾨이어러라는 주간 대중잡지가 대박이 터지는 일이 발생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친척 중 한 명이 엘비스의 시신을 몰래 찍어 18000달러를 받고 이 잡지에 팔아 넘긴 것이다. ‘내셔널 인콰이어러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신 사진을 표지에 싣고 대서특필했는데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은 부수를 판매하는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영화 '모던 타임즈' 속 찰리 채플린 

 

20세기를 대표했던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1889~1977, 영국)유명인 숭배 신드롬의 피해자였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은 4개월 후 또 한 명의 세계적인 유명 스타였던 찰리 채플린이 사망해 그가 요양차 머물렀던 스위스의 코시어 서베이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4개월 후인 1978 31일 찰리 채플린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발생 11주만에 제네바 호수 근처에서 시신이 발견되고 범인이 체포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지만 유족과 채플린을 좋아했던 전세계 팬들은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전세계 유명인들이 죽어서도 수난을 당하는 상황에서 채플린 유족들은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묘안을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채플린 유족들이 무덤 도굴을 막기 위해 내놓은 묘안은 무엇이었을까?

 

찰리 채플린은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정작 활동은 미국이 주무대였다. 특히 채플린 자신이 직접 제작·감독·각본·주연까지 맡은 <모던 타임즈>는 탁월한 문명비평영화로 영화의 고전 중에 고전으로 통한다.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 노동자로 등장한 채플린은 하루종일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지독한 노동에 시달린다. 결국 채플린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퇴원하고도 일자리가 없어 거리를 방황하다 시위군중에 휩쓸려 감옥 신세까지 지게 된다. 채플린은 출옥 후 빵을 훔친 한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소녀와 함께 거리의 떠돌이로 남게 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밖에도 <위대한 독재자>, <살인광 시대>를 통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했고 전쟁의 참혹상을 고발했다. 하지만 찰리 채플린은 이런 영화 때문에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20년 가까이 미국 땅을 밟지 못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우나 오닐과 찰리 채플린. 사진>부산일보 

 

영화배우로서 수난을 겪었던 찰리 채플린은 그의 인생 또한 순탄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고 열 살 무렵에는 어머니가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의 사랑을 몰랐던 그는 울지 않기 위해 웃는 법과 웃기는 법을 익혔다고 한다. 훗날 찰리 채플린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세계 영화사에 확실한 발자취를 남긴 것도 불행했던 어린 시절 때문이 아니었을까. 특히 우나 오닐과의 결혼은 각종 화재를 뿌리며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스캔들이기도 했다. 찰리 채플린의 네 번째 부인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을 지킨 유일한 사람도 우나 오닐이었다.

 

우나 오닐은 노벨상 작가인 유진 오닐의 딸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려 18살의 나이 차이는 극복하기 힘든 현실이기도 했다. 유진 오닐은 딸 우나 오닐이 자신보다 한 살 어린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을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우나 오닐에게 유진 오닐은 자신을 버린 무심한 아버지일 뿐이었다. 결국 우나 오닐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찰리 채플린과의 결혼에 성공해서 35년간 같이 살았다.

 

한편 우나 오닐이 찰리 채플린과 결혼하기 전 만났던 남자가 있었다.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샐린저(Jerome David Salinger, 1919~2010, 미국)였다. 우나 오닐이 이미 찰리 채플린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샐린저는 키도 작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찰리 채플린을 무시했다. 하지만 우나 오닐은 찰리 채플린을 선택했고 샐린저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샐린저가 그의 작품 속에서 보여준 허무주의가 바로 이 사건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쨌든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결혼에 성공했고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찰리 채플린과 우나 오닐은 1953년 스위스에 정착했고 1977년 크리스마스 이브 찰리 채플린이 88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부부로 살았다. 그러나 4개월 후 발생한 남편의 무덤이 도굴된 사건은 우나 오닐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나 오닐은 시신 수습 후  남편 찰리 채플린을 다시 무덤에 매장하면서 관 위에 2미터 두께로 콘크리트를 부었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묘책이었. 유명세 때문에 겪은 수난이 죽어서도 계속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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