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옛날 포스팅/따따부따

KBS 항의 방문, 죽은 기자정신에 분노하다

반응형

사시(사법 고시), 행시(행정 고시), 외시(외무 고시)를 흔히 삼시라고 부른다. 필자가 대학을 다닐 때는 여기에 하나를 추가해 사시라는 말이 있었다. 물론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도 아닐 뿐더러 고시도 아니었지만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바로 언론사 취업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언론사 취업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언론사 취업을 '언론 고시'라고 해서 삼시에 덧붙여 사시라고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삼시니, 사시니 하는 말에는 우리 사회의 직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깊게 배어있기도 하다. 

 

요즘 폐지 논란도 있지만 삼시는 끼니조차 해결이 어려웠던 시절 계층 상승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특히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로 가난의 대물림이 고착화되어가고 있는 요즘에는 삼시가 아니고는 신분 상승은 꿈도 꾸기 어렵게 되었다. 과거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도 삼시 합격을 빗대 한 말이었다. 삼시에 합격할 확율이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만큼 힘들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취업 준비생들에게 언론사도 마찬가지였다. 삼시처럼 언론사 취업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관문이었다. 그러나 삼시니 사시니 하며 고시와 언론사가 꿈의 직장이었고 출세의 수단이었지만 정작 그 직업들이 가지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얼마나 생각해 보고 고민해 봤을까. 따지고 보면 어떤 직장보다 '직업 윤리'가 요구되지만 '출세'라는 현실적인 요구 앞에서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직업들을 통해 사회 지도층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으니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도덕적 해이, 안전 불감증, 무사안일, 복지부동 등의 몹쓸 병들도 이런 잘못된 직업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어제 KBS를 항의 방문해 4시간 넘게 농성을 벌였다고 한다. 직접적인 이유는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망언 때문이었다. 김시곤 보도국장은 직원들 회식 자리에서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건 아니다'라고 말해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국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는 인물이다. 또 KBS 항의 방문을 마친 유가족들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청운효자동주민센터로 이동해 경찰과 밤새 대치하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오죽 했으면 KBS 항의 방문까지 했을까 싶지만 단순히 KBS만을 향한 분노는 아니었을 것이다. 300명이 넘는 희생자 앞에서도 제대로 된 현장 보도보다는 정권 눈치보기에 급급한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에 대한 불만과 항의의 표시였을 것이다. 어제 일부 공개된 KBS 사내 보도정보시스템에 올라온 글은 대한민국 언론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KBS 젊은 기자들이 세월호 참사 취재와 관련 '반성합니다'라는 제목의 반성문에서 'KBS 기자는 기레기(기자+쓰레기)로 전락했고, 사고 현장에 가지 않고 리포트를 만들었고, 매맞는 것이 두려워 실종자 가족들을 만나지 않고 기사를 썼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서 'KBS 저널리즘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요구하는 막내 기자들의 목소리를 수뇌부는 어린 기자들의 돌출 행동으로 치부하려 한다'며 최근 KBS 보도 태도를 비판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게 단순히 KBS 기자들만은 아닐 것이다.

 

 

 

필자도 대학 시절 언론을 전공했고 또 '언론 고시'라 불렸던 언론사 취업을 준비하기도 했다. 물론 실패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출세'라는 목표를 빼면 왜 그토록 언론사 취업을 갈망했는지에 대한 목표가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 세월호 유가족들의 KBS 항의 방문 기사를 보며 문득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누렇게 색이 변해 먼지만 잔뜩 뒤집어 쓰고 있는 책. 여태 버리지 않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도서출판 녹진에서 1993년 출판한 '프로가 되자 시리즈' 두번 째 책인 <기자가 되자>다. 책을 펼치자마자 캐캐한 냄새가 코를 찌르지만 책장을 넘길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몇몇 내용들은 대한민국 언론의 민낯을 되돌아보게 한다. '기자는 이런 사람에게 어울린다' 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언론에 피해를 본 사람들을 위해 언론중재위원회라는 기구도 만들어져 있다. 이것만 봐도 객관적인 기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정확한 기사는 기자의 명예, 심지어는 기자로서의 생명과도 직결된다. 그러므로 기자는 앞뒤를 논리적으로 바라보고 객관적인 기사를 쓰려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사물과 현상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과 약자와 정의의 편에 설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정치, 경제, 역사 등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대한 통일적 인식력 등이 구비되어야 한다. -<기자가 되자> 중에서-

 

'기자, 그것이 알고 싶다' 편에서는 기자의 책임감을 언급하고 있다.

 

기자의 의도와 상관 없이 억울한 피해를 입는 당사자가 생기기 마련이고, 또 수많은 독자들이 기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허위를 사실로 믿고 그 사실이 사회적으로 잘못 유포될 수 있다는 점이다. 기사의 생명이 객관, 사실 보도라면 기자의 생명은 대중들로부터 받는 신뢰감이다. 선정주의에 굴복한 기자의 가벼운 펜대놀림은 언젠가는 대중들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 기자에게는 조사 하나, 토씨 하나에까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자가 되자> 중에서-

 

기사의 생명이 객관, 사실 보도라면 기자의 생명은 대중들로부터 받는 신뢰감이라는 대목에서 과연 대한민국 언론은 이런 책임의식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 언론은 죽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래 공감 버튼(twitter, facebook....)을 클릭하시면 더 많은 분들과 이 글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