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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따따부따

버큰헤이드호와 세월호, 이렇게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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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해군 수송함 버큰헤이드(Birkenhead)호가 군인들과 가족들을 태우고 항해하고 있었다. 전체 승선 인원은 630명으로 이 중 130여 명이 여자와 아이들이었다. 순항하던 버큰헤이드호에 비상 상황이 일어난 때는 모든 승객들이 잠든 1852년 2월 26일 새벽 2시였다. 버큰헤이드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수도 케이프타운으로터 140km 떨어진 해상을 지날 때 암초에 부딪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잠에서 깨어난 승객들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버큰헤이드호가 구비하고 있던 구명보트 정원은 승선 인원에 턱없이 모자란 180명에 불과했다. 이런 혼란 속에 버큰헤이드호의 함장은 병사들을 갑판 위에 집합시킨 뒤 부동자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구명보트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태웠다. 병사들은 그대로 부동자세를 유지한 채 버큰헤이드호를 떠나는 구명보트를 바라봤고 이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구명보트의 여자와 아이들은 남편과 아버지가 물 속에 잠기는 모습을 보면서 울부짖었다고 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 대한 진실성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그 질흑같은 새벽에 어떻게 배가 침몰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 버큰헤이드호 침몰 사건으로 생존한 193명 중 여자와 아이는 20명에 불과했다는 등 의문과 의혹이 끊이질 않지만 어쨌든 이 사고를 계기로 재난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여자와 아이 먼저'라는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 버큰헤이드호. 사진>구글 검색 


요 며칠 동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충격 속에 빠지고 말았다. 인천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바다에서 침몰한 것이다. 사고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승객 대부분이 구조될 것 같던 상황이 오후 들어 급작스레 500명에 가까운 승객 중에 구조자는 170여 명에 불과하다는 보도로 바뀌면서 전국이 온통 눈물 바다가 되고 만 것이다. 게다가 승객 중 상당수가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는 길이었던 안산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고 이 중 구조자는 전체 325명 중 70여 명으로 침몰한 세월호에 갇힌 실종자 대부분이 이들 고등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책임지고 실종자들을 구조해야 할 정부는 잘못된 정보를 쏟아내면서 실종자 가족들과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실종자 가족과 국민들의 분노는 세월호 선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 첫번째 구조선을 타고 배를 탈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극에 달하고 있다. 세월호 승무원들이 탈출하는 사이 침몰해가는 배 안에서는 움직이지 말고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선사측의 방송만 믿고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승객들이 탈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보도에 따르면 세월호 승무원 29명 중 생존자는 20명으로 전체 승무원의 69%가 생존했지만 안산 단원고 학생들은 전체 325명 중 23%인 75명만 구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세월호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안전한 대피를 돕고 마지막으로 탈출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위기 대응 매뉴얼도 지키지 않은 것이다. 

 

▲ 세월호. 사진>다음 검색 


물론 버큰헤이드호와 세월호 침몰 사건을 비교하는 데는 어느 정도 무리가 있다. 학생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구조되기 직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어른들이 있었고, 어떤 학생은 엄마를 잃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섯 살 아이를 끝까지 가슴에 품고 구조선을 타는 모습이 생생하게 TV 화면을 채우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뭉클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종자 대부분이 학생들이라는 사실은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따지지 않더라도 어른들의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만드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버큰헤이드호의 아름다운 전통'은 오히려 배운 적도 없었을 어린 학생들이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버큰헤이드호의 함장처럼 장렬한 아닐지언정 선장으로서, 기관사로서, 승무원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만 지켰어도 더 많은 학생들이 구조될 수 있었을텐데 생각하면 분노가 쉬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1997년 개봉된 영화 <타이타닉>을 기억할 것이다. 1912년에 일어났던 실제 사고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로즈(케이트 윈슬렛)가 타고 있는 부유물 조각을 붙들고 숨을 거두는 장면, 침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노부부, 끝까지 연주를 멈추지 않던 밴드 연주자들과 함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바로 죽음의 문턱에서도 끝까지 키를 잡고 배와 함께 죽음을 맞이한 선장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선장이 정녕 없는 것일까 하고 그저 안타까워해야만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분노는 잠시 접어두고 배 안에 갇힌 실종자들이 살아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간절히 바라고 믿어야만 오는 게 기적이다. 지금 우리 모두가 할 일은 기적을 만드는 기적같은 바램과 믿음일 뿐이다.

 

문득 이런 질문을 해본다. 나는, 우리는 절대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버큰헤이드호의 전통'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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