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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소설 속 낯선 우리말①, 보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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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말[言]의 홍수 시대다. 그 진원지는 바로 바다 건너 세상과 인터넷이다. 반면 불타는 가뭄을 온몸으로 맞서고 있는 말도 있으니 일상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우리말이다. 일상 대화 중에 또는 높으신 분들의 연설 중에 외래어나 외국어를 섞어 말하면 자신의 위상이 높아지는 양 현학적인 단어 선택은 아름다운 우리말의 존재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터넷 속의 출처도 불분명한 말들은 외계어라는 이름으로 일상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제 우리말은 TV 속 우리말을 소개하는 짧은 코너에서나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문화 교류를 역설하지만 정작 우리 문화의 핵심인 우리말은 그 설 자리를 빼앗기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소설을 읽다보면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몇 백 년 전의 소설도 아니고 불과 몇 십 년 전에 쓰여진 소설조차도 주석이나 낱말풀이가 없으면 문장 해석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치 영어 사전을 펼쳐놓고 영문 소설을 읽었던 대학 시절처럼 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외래어나 외국어, 외계어는 낯익은데 우리말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게 요즘 우리 현실이 아닐 수 없다. 말뿐인 문화 선진국이 아니라 옛 사람들의 혼과 얼이 담긴 우리말의 복원이야말로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디딤돌이 아닐까 싶다. 

 

'보짱'이란 말을 아는가? 얼핏 일본말에서 우리의 '님, 씨'에 해당하는 존칭 접미사인 '상,산(樣·さん)'의 어린이말인 '짱'의 영향을 받은 말이 아닐까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나쓰메 소세끼의 소설 <도련님>의 원제목이 '보짱'이다. 하지만 우리말 '보짱'은 전혀 다른 의미다. 먼저 '보짱'의 뜻을 알아보기기 전에  우리 문학이나 언론 기사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보자.

 

먼저 1937년부터 1938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되어 부조리한 1930년대의 사회상을 풍자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그러니 그렇다면은 밀고는 하기는 해도 일이 한꺼번에 와락 튕겨지지를 않고 수군수군하는 동안에 제가 눈치를 채도록 그렇게 어떻게 농간을 부리는 재주가 없을까? 어제로 그저께로 형보의 골똘히 궁리하고 있는 게 이것이다. 태수는 형보의 그러한 험한 보짱이야 물론 알고 있을 턱이 없다. 그는 가꿈 무서운 꿈을 꾸어도 깨고 나면 종시 명랑하고 유쾌하다. 오늘 아침에는 그는 자리 속에서 잠이 애벌만 깨어 눈이 실실 감기는 것을 초봉이가 보이지 않으니까 보고 싶어서, 여보오 하고 영감처럼 그렇게 구수하게 부르던 것이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 중에서-

 

또 1922년 7월부터 9월까지 『신생활』에 연재되다 잡지 폐간과 함께 중단되었던 염상섭의 중편소설 <만세전>에도 '보짱'이 등장한다. 참고로 <만세전>의  원제는 <묘지>로 1924년 시대일보가 창간되면서 제목을 '만세전'으로 바꾸어 다시 게재하였는데 원제인 '묘지'에서 보듯 3·1운동 이전의 위축된 사회 현실을 그리고 있다.

 

최참봉이라면 내가 어렸을 때에는 우리 집하고 격장에서 살던, 청구 일군은 고사하고 충청도 원판에서도 몇째 안 가는 재산가이었다. 술 잘 먹기로도 유명하고 외입깨나 하였지마는 보짱 크기로도 유명하였다. 작은형수라는 사람은 내가 소학교에 들어갈 때에 지금 마루에서 뛰어다니는 형님의 딸년만하였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여보니까, 부엌에서 음식을 차리고 있는 노부인이 낯이 익은 법하기도 하고 일편 반갑기도 하여서 혼자 웃으며,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 중에서-

 

한편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소설 속에도 '보짱'을 찾아볼 수 있었다. 김인배의 장편소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로 스포츠 한국 기사에서 발췌했다.

 

어느 날 문득, 그대의 영혼이 "바다가 보고 싶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는 적이 있는가? 그땐, 한반도의 남녘 끝 거제도로 가보라. 그곳에 가면, '바람의 언덕'이라 불리는, 그 섬의 남쪽 끄트머리 해안에서 그대는 대한해협의 망망대해를 만날 수 있다. 거기 서면, 삶의 괴로운 순간에, 차라리 즐거웠던 날을 반추하는 시간이 된다. 거센 바람은 쉼 없이 파도를 몰아다가 그대의 가슴 벽을 때린다. 오래 부접하기 더넘스러운 바람받이라도 보짱 버티고 있다 보면 어느새 마음도 느즈러지기 마련. -김인배의 장편소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 중에서-

 

그러나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인지 언론사 기사 속에서 '보짱'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한국일보에서 소설 <녹두장군>의 저자 송기숙 작가를 소개하는 기사에서 '보짱'을 찾았을 뿐이다.

 

올해 칠순에 등단 40년을 맞은 노 작가 송기숙씨는 문학인이면서 당대의 내로라 하는 근대사학자들의 게으름을 꾸짖는 보짱과 실력을 갖춘 드문 작가다. 그의 문학이 성취해온 바, 동학농민전쟁이며 한국전쟁 분단문제 등이 시간의 각질을 벗고 이 시대의 정서에 감동으로 스미는 것은, 그가 구사하는 문장과 행간에 밴 체득(體得)된 정감으로서의 민중성이 있기 때문이다.-한국일보 2005년 2월28일 기사 중에서-

 

위에서 소개한 소설과 기사를 보고 '보짱'의 뜻을 대강은 눈치챘을 것이다. '보짱'의 정확한 뜻은 '마음 속에 품은 꿋꿋한 생각이나 요량'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배짱'과 비슷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배짱'은 '마음 속으로 다져먹은 생각이나 태도'를 뜻한다. 의미도 어감도 비슷하지만 '보짱'은 요즘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배짱'만 일상 속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보짱'을 옛 문학 속에서만 만날 수 있지만 누군가 자주 사용하다보면 다시 일상어의 지위를 얻게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말로만 문화를 들먹이는 권력과 선량들에게 촌철살인 돌직구를 날릴 수 있는 '보짱'과 '배짱'을 갖춘 교육·문화 당국자가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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