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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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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김만옥/1986년

 

"당신은 지금 살기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살기 좋은 세상' 이란 것이 '○○○은 ○○○이다'와 같이 정확한 정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각양각색인지라 선뜻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소시민'이라고도 부르는 보통 사람들의 대답은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머리카락 한올한올마다에 굴곡진 인생의 자화상을 선명하게 아로새긴 사람들 집단에서는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안방에서 클릭 하나만으로 지구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주말에는 바다 건너 휴양지에서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고, 전화 한 통이나 클릭 한 번으로 끼니마저 해결할 수 있으니 과거와 비교한다면 어찌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편 소위 좀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각종 지표들을 들이대며 조목조목 따지고 들 것이다. 소시민들에게 기꺼이 선생님이 되기를 자처할 것이고 심지어 '살기 좋은 세상'과 그렇지 못한 세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냐'만 외쳐대는 그들에게 비웃음을 선사할지도 모른다. 무릇 지식인들은 책 속의 앎을 배경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그 안에 살고 있는 수많은 소시민들을 어리석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지혜로운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아닌)로 구분하기를 즐기는 집단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역사는 대다수 어리석은 소시민들의 흐릿한 발자취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이라는 것.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세상과 역사의 거울에 비춰지는 그림은 그렇다.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고발하다

 

김만옥의 소설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은 어리석은 소시민과 똑똑한 지식인을 에워싸고 있는 가면을 한꺼풀 벗겨내려 한다.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다. 소설 속 지식인만 심각할 뿐이다. 착하디 착한 우리네 소시민 이웃들의 어리석은(?) 일상은 지식인의 고민을 더 부채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거 아는가! 소시민들의 일상이 순박하면 할수록 지식인의 실체는 본색을 드러내고 점점 초라한 행색으로 변해간다는 것. 즉 지식인을 조종하고 있는 가식과 허위가 힘을 잃게 되는 것이다. 국장님과 소장님으로 불리는 내 사촌들. 사실 그들의 직업은 의령군 가례면 별정 우체국장과 시외버스표 판매소장이다. 사촌들 모임에 파출소장까지 참석할라치면 사촌들 호칭이 대략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이 곳에서는 그렇게들 부른다.

 

소설은 작가이자 간간이 신문에 기고를 내는 화자인 '나'의 사촌인 별정 우체국장이 죽은 날 저녁 '나'와 또 다른 사촌인 시외버스표 판매소장 그리고 파출소장이 술을 마시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그 중심에는 시골 우체국의 별정직 국장이 있다. 직함에 걸맞지 않게 국장은 순박하기 그지없는 시골 촌부다. 구두 두 켤레로 평생을 살아왔고 백 원짜리 아이스크림 한 번 사 먹은 적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장차 쓰고 싶은 데 쓸라꼬 묵고 싶은 거 입고 싶은 거 참는 기라'고. 그는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이웃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국장이 세상사에 눈을 감고 살았던 것만은 아니다. 그게 호기심이든, 불의에 대한 분노든 중요한 것은 역사의 한복판을 그저 맹 하게만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역사란 이런게 아닐까. 이념으로 무장된 몇몇 엘리트들의 순교자적 열정이 아닌 소시민들의 살기 좋은 세상에 반하는 제도나 세력을 향한  분기탱천이 모여서 도도한 강물을 이루는 것.

 

발을 밟힌 사람인지 누군가가 "이 양반 왜 이래?" 하는 소리도 들렸고 혀를 차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상당히 민망쩍어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호기심 많고 구경 좋아하는 그의 성격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며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에 비해 겁이 많은 그가 일천구백육십 년 삼 월에 마산에서 취한 태도는 또 어떠했던가? 집 안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그의 호기심이 너무 컸고 현장에 뛰어들기에는 또 너무 겁이 많아 그는 정말 괴롭게 그의 큰집인 우리 집과 현장 사이를 왔다 갔다 했던 것이다.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중에서-

 

국장을 둘러싼 인물들은 어떤가. 주인공 '나'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은 국장과 같은 소시민들이 말하는 '살기 좋은 세상' 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한다. '나'는 '정작 모든 것을 누리고 이렇게 살기 좋은 세상이라 해야 할 사람들은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을 독차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그들이 살기 좋은 세상에 사는지 어쩌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 대한민국'이라는 관제 가요에 친구라도 만난 듯 얼굴이 환해지는 국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지식인인 '나'는 역사의 순간마다 무엇을 했던가. 소설이 말한 지식인의 허위 의식은 바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이다. 이는 4.19 혁명에 대한 원죄의식으로 연결된다. 또 소설의 배경인 1980년대는 군사정권의 폭압정치로 민중들의 분노가 폭발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이었다. 또 다시 '행동하는 양심'을 요구하던 시절이었다. 지식인의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국장의 때로는 순박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해 더욱 더 비열하게 부각된다. 특히 작가인 '나'는 국장과 달리 앞을 못보는 고모와 벙어리인 고종사촌의 얘기를 그저 소설의 주제로 삼을만큼 가식과 허위로 가득 차 있다.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우는 것은 위선이었고 한 꺼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귀찮고 보기 흉하고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싹둑싹둑 잘라 없애고 싶은 게 내 본색인 것이다. 가난뱅이도 없애고 불구자도 없애고 약한 자도 없애고, 잘 가꿔놓은 정원이나 잘 다듬어진 문장처럼 말썽스럽고 귀찮고 보기 흉한 군더더기는 다 잘라버리고 싶은 게 내 본색음을 문득문득 깨닫는 것이다. 그럴리야 없겠지만 나 같은 사람을 지도자로 삼는 사회를 상상해보았다. 보기 싫고 말썽스러운 모든 것들을 가두고 싶어 하고 죽이고 싶어 할 게 아 말이다.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중에서-

 

살기 좋은 세상의 조건

 

또 다른 사촌인 소장은 어떤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논설위원이라고 부른다. 촌사람 어깨 피고 살라면 그 정도 거짓말은 해두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과시욕이라고 할 수 있다. 파출소장도 마찬가지다. '나'와 서울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시골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벗어나려 한다. 한편 소설이 자신의 시대를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표현한 국장의 솔직한 자기고백과 국장이 '장차 쓰고 싶은 데'라고 했던 꿈이 바로 재산을 털어 만든 장학재단이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은 허위의식과 과시욕으로 점철된 주변인물들에게 더 나아가 저자 자신과 또 그럴지도 모를 독자들에게 보내는 저자의 자기 반성적 메세지일 것이다. 

 

"내가 살기 좋은 세상이라 캐쌓는 거는 대학생 걸마들 데모한다는 말만 들으모 내 가슴이 철렁하기 때문인 기라. 지끔 이만큼이라도 사는거를 다 뿌사부리모 우짜노 싶어서. 그 어렵던 시절 사촌도 생각나제?"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중에서-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지식인이라고 했지만 정작 나 또한 속물 지식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국장이 말한 '살기 좋은 세상'에 동의하지 못하겠기에 말이다. 그렇다면 진짜 '살기 좋은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소설 속 국장의 '살기 좋은 세상'은 한때 개그 프로에서 패러디해 유행했던 어느 진보정당 대표의 '살림 좀 나아지셨습니까?'의 의미가 빠져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문명의 이기로 인한 생활의 편리는 외형적인 '살기 좋은 세상'일뿐 거기에는 각 개인의 '삶의 질'이 빠져있다. 또 현대사회에서의 '삶의 질'이란 부족함 없는 살림살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최근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정부의 세제 개편안만 봐도 그렇다. 야당에서는 세금폭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자기모순적 정치공세일 뿐이고 이번 세제 개편안의 방향은 옳다. 복지를 위해서 증세는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적 저항에 부딪쳐 끝내 재검토라는 사실상 철회 단계에 이른 이유는 복지예산 마련이 지난 정권 내내 이루어졌던 부자 감세를 철회하거나 부자 증세가 아닌 만만한 직장인들의 유리지갑만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세저항의 핵심은 '세금폭탄'이 아니라 이런 상대적 박탈감 내지는 불평등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살기 좋은 세상'의 조건은 분명 '삶의 질'의 향상이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적 박탈감이나 불평등이 존재해서는 안된다. 땀의 댓가는 늘 공평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부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하지 않을까. '복지는 늘리되 증세는 않겠다'라는 말이 선거용 구호였다는 것을. 대통령이 지난 대선 당시 말한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곧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이 포함된 '살기 좋은 세상'일 것이다. 정부의 정책으로 많은 국민들이 상대적 박탈감, 불평등을 느낀다면 '살기 좋은 세상',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그저 헛구호에 불과할 것이다. 마치 자신은 몰랐던 것처럼 장관들만 타박할 게 아니다. 이번 세제 개편안이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한다면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고 '복지를 위해서는 증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해야하지 않을까. 또 그 방향은 만만한 직장인들의 유리지갑이 아닌 '부자 감세'의 철회로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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