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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팜비치에는 팜비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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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비치/최정화/2012년

 

"이이는 늘 이런 식이에요. 정말 엉뚱하죠?"

"아직 소개를 안했지? 자기 애들이 바다에서 노는 동안 나더러 파라솔을 잠깐 써도 좋다고 하셨어. 이분은 가족과 함께 팜비치에 사신대. 여보. 진짜 팜비치 말이야."  -<팜비치> 중에서-

 

최정화의 소설 <팜비치>에서 무슨 대단한 비밀을 말하는 양 아내는 '진짜 팜비치'라고 말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내는 '그'가 상어 튜브를 가져오느라 오랜 시간을 지체한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다. 지금 이 젊은 부부는 네 살 난 딸애를 데리고 팜비치 해변에서 한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중이다.

 

우리 시대 고개숙인 가장의 슬픈 자화상

 

미국 지도를 보면 매부리코마냥 대서양을 향해 삐죽 튀어나온 곳에 팜비치(Parm Beach)라는 세계적인 휴양지가 있다. 필자처럼 가보지 못한 독자라면 최소한 야자나무가 우거진 애머랄드빛 바다가 있는 해변 사진은 적잖이 봤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팜비치란다. 이름에서 보듯 이 도시의 초기 개척자들이 난파선에서 떠밀려온 야자나무 열매를 해변에 심어 야자나무가 우거진 항구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야자나무 도시'라는 뜻의 팜시티였다가 나중에 팜비치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세계 부유층이 즐겨 찾는 사치스럽고 화려한 휴양지로 유명하다.

 

팜비치의 아름다운 해변 때문인지 아니면 럭셔리한 휴양지를 본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세계에는 수많은 짝퉁 팜비치가 존재한다. 해변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팜비치 리조트, 팜비치 펜션까지. 심지어 발라 이름도 팜비치빌인 곳이 있다. 여기에 팜비치 모텔까지 있고 보면 팜비치가 단순히 아름다운 해변의 대명사만은 아니지 싶다. 소설 <팜비치> 속 부부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곳도 짝퉁 팜비치다. 목소리를 낮추어 '진짜 팜비치'라고 말한 아내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 '그'에게서 하수상한 시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우리 시대 가장들의 축 쳐진 어깨가 연상되는 것은 '팜비치'가 주는 지나치게 럭셔리한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궁둥이를 씰룩거리며 끝도 없이 펼쳐진 해변을 따라 걸었다. 그런 일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의심 없이 그저 하던 대로 쭉 하는 것 말이다. 그런 성격은 그의 직업과 잘 맞았고 입사 삼년 차에 그는 동기 중 최고속 승진을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들어서 그의 직책이 위기 상황 대처능력이라든가 융통성 같은 덕목을 필요로 했을 때 그는 식은 땀을 흘렸고 그를 바라보는 상사의 눈초리는 탐탁지 않았다. 그는 오년째 승진에서 쓴 물을 마셨다. 하지만 그는 동료들처럼 퇴직 이후의 삶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랄 수도 있었다. -<팜비치> 중에서-

 

엉덩이는 탄력을 잃었고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선 채로는 자기 발가락을 볼 수도 없는 삼십대 중반의 우리 시대 평범한 가장에게 팜비치는 비루한 일상의 탈출이라는 꿈같은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해변에서조차 가장에게 안겨진 무거운 짐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기는커녕 일상에서보다 더 큰 중력의 압박을 받는다. 상어 튜브를 가지러 호텔로 가는 도중 '팜비치 가족을 위한 한낮의 해변 콘서트'에서 본 플래카드는 주인공 '그'가 짊어진 짐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인다. 바람이 불 때마다 좌우로 기우뚱거리는 플래카드. 마침내 그를 향해 거꾸러진 플래카드를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움켜잡는 행위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나마 플래카드는 구멍을 뚫으면 바람을 이길 수 있는데 그에게 불어닥친 삶의, 생존의 바람은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결국 '그'에게는 일탈의 도시 팜비치에서도 팜비치는 없었다.

 

보통 사람들의 꿈

 

한편 팜비치는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는 곳이다. 비록 실재하는 팜비치의 이름을 빌린 짝퉁 팜비치이지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진짜 팜비치에 대한 꿈이 영그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팜비치에서도 주인공 '그'의 꿈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냄새야말로 정말 공평해. 돈을 내지 않고도 이렇게 잔뜩 맡을 수 있다니 말이야."에서 현실에 갇혀버린 그러나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세계가 또한 팜비치에는 존재할 수 있다는 순박한 희망의 메세지다.

 

아내가 진짜 팜비치에서 왔다는 매부리코 사내 부부를 부러워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모자를 스무개째 들여다보고, 물놀이 하는데 상어 튜브가 꼭 필요하다는 투정이 단순히 허영심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그'가 아내와 딸애의 투정을 묵묵히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들의 꿈을 지켜주고자 함일 것이다.

 

이제 상어튜브 생각뿐이었으니까. 내릴 때도 그는 제일 먼저였다. 재빠른 걸음걸이로 417호로 가 열쇠구멍에 열쇠를 꽂고 문고리를 돌렸다. 서두르자. 어서 튜브를 찾아내 씩씩한 공주와 신경쇠약에 걸린 왕비를 구해내자.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상어를 잡아 바치자! -<팜비치> 중에서-

 

그러나 주인공 '그'가 팜비치에서 본 것은 아름답고 럭셔리한 세계가 아니다. 중년의 여자들은 바람을 피우고 딸들은 시시껄렁한 연애를 하는 불량한 세계일 뿐이었다. 팜비치를 꿈꾸지만 짝퉁 팜비치에 존재하는 것은 작은 유리조각이 살 안쪽에 깊이 파고어 만든 상처뿐이다.

 

엉덩이를 들 때 고개를 숙이다가 그는 발바닥에서 뭔가 발견하고 유심히 살펴보았다. 반짝이는 작은 유리조각이 살 안쪽에 깊이 파고들어 있었다. 텐트 밖에서는 상어의 머리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ㄱ는 상어의 이빨을, 그리고 다시 발바닥의 상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삼각형 모양으로 살점이 떨어져나간 상처는 마치 날카로운 이빨이 박혔던 자국처럼 보였다. -<팜비치> 중에서-

 

팜비치는 보통 사람들의 이룰 수 없는 꿈에 대한 대단한 역설이다. 사실 딸애는 스티로폼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었다. 팜비치는 가장의 소박한 꿈과 보통 사람들의 이상이 영그는 곳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비루한 현실을 확인하는 곳이기도 하다. 진짜 팜비치는 딱 하나뿐이니까.

 

팜비치에는 팜비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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