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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책 이야기

귀태 발언의 저급성이 국회파행의 명분이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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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반역을 꾀한 죄인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친족, 외족, 처족 등 삼족이 화를 당해야만 했다. 이처럼 연좌제란 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특정 범위의 사람들이 연대책임을 지고 처벌되는 제도를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구족까지 연대책임을 졌다고 하니 연좌제는 특정 개인의 기회 균등을 말살하는 가장 전근대적인 형벌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연좌제가 폐지되었으나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으로 인해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실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최근까지도 법의 테두리 밖에서는 완전히 없어졌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근대국가 태생 당시 폐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존치하고 있었던 우리나라에서의 연좌제는 1980년 헌법에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는 규정을 신설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느닷없이 연좌제를 언급한 이유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귀태' 발언 때문이다. 논란을 야기한 당사자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듣는 사람들은 연좌제의 악몽을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난 11일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변인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을 인용해 '책에 귀태(鬼胎)라는 말이 나오는데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뜻'이라며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후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은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물 현 시국이 위기상황이라지만 국민의 선택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을 향해 한 말치고는 도를 넘어도 한참 넘었다.

 

 

 

사실 이번 논란을 보면서 '귀태'란 말을 처음 들었다. 한자어인 '귀태'를 그대로 직역하면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이란다. 즉 귀태란 마음 속에 두려움을 품는 것이라는 뜻이지만 이보다 더 부정적으로 '태어나서는 안될'이라는 뜻의 조어로 일본 작가 시바 료타료가 '제국의 귀태'를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홍 대변인이 인용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라는 책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한다. 내용은 대충 이렇단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도쿄대 강상중 교수가 쓴 책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의 감정 밑바닥에는 만주국이라는 공통 모태가 자리하고 있는데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모두 일본제국의 분신 만주국이라며 박정희의 유신은 만주국의 유산이고 이 유산을 낳은 주인공이 바로 기시 노부스케라는 것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으로 복역을 마친 뒤 1957년 일본 총리까지 지낸 인물이다. 홍 대변인은 이 내용에 덧붙여 '아이러니하게도 귀태의 후손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며 '바로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다'라고 말했다. 홍 대변인이 지나치게 비약·해석해서 문제지 책 속의 표현만 놓고 따진다면 충분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커밍아웃한다면 나에게 새누리당은 뼛 속부터 어긋나 있는 정당이다. 그러나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것과 연좌제를 연상시키는 홍 대변인의 발언은 별개의 문제다. 물론 나도 박정희 운운하며 박근혜 대통령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저잣거리의 말과 공당 대변인의 그것은 엄연히 구분되어야 한다. 잘못된 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귀태 발언은 한국 정치의 저급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막말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새누리당이 귀태 발언을 국회 파행의 명분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것과 귀태 발언을 비판하는 것이 별개이듯이, 귀태 발언과 국회 파행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마치 물 만난 고기마냥 '이때다' 싶게 연일 비난 수위를 높이고 있다. 국가 기관, 국정원의 국내정치 개입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새누리당이 귀태 발언을 명분으로 국회를 파행시키는 것도 이런 국민적 비난을 모면해 보려는 물타기로 비춰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새누리당이 과거 정부에서 했던 말들을 기억한다면 저급하기로는 홍 대변인의 막말과 개진도진이다. 국민들은 과거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퍼부었던 저주에 가까운 막말들을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지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귀태 발언을 비난하는 새누리당 국회의원들도 낯은 뜨거울 것이다. 어쨌든 지금 정치권에서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고 있는 국정원의 선거 개입 사건에 대해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국정원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귀태 발언, NLL, 4대강으로 물타기 하기에는 국민들의 잠재된 분노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뱀 그림에 다리 하나 덧붙이자면 좋은 책, 양서란 어떤 책일까 생각해 본다.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는 일은 어렵지만 그 책을 읽고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드느냐의 과정과 결과는 호불호가 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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