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녀/신동엽(1930년~1969년)
모질게도 높운 城돌
모질게도 악랄한 채찍
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
죄없는 월급쟁이
가난한 백성
平和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
산에서 바다
邑에서 邑
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
봄 따라 왁자히 피어나는
꽃보라
돌팔매,
젊어진 가슴
물결에 헐려
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餓鬼들은
그혀 도망쳐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旗幅을 쏘았나?
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銃알을 박아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
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
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
四月十九日,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 高原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운 半島에 移住 오던 그날부터 삼한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운 흰 허리들의 줄기가 三·一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방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
쥐구멍을 찾으며
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
흘러가버리렴아, 너는.
오욕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게.
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太白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진달래·개나리·복사
알제리아 黑人村에서 카스피해 바닷가의 村아가씨 마을에서
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
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
항거처럼 일어난 이 새피 뿜는 불기둥의
항거……
沖天하는 자유에의 의지……
길어도 길어도 다함없는 샘물처럼
정의와 울분의 행렬은
억겁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
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
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의
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
김대성이 석가탑을 창건할 당시 가장 뛰어난 석공으로 알려진 백제의 후손 아사달을 불렀다. 아사달에게는 아사녀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남편이 석가탑에 온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동안 그리움을 참지 못하고 불국사로 찾아왔다. 그러나 탑이 완성될 때까지는 여자를 들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아사녀는 불국사에 들어가지 못한 채 몇날 몇일을 불국사 앞을 서성거렸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스님이 아사녀가 남편을 볼 수 있도로 꾀를 한가지 내었다.
스님은 불국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작은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서 지성으로 빌며 탑이 완성되는 날 연못에 탑의 그림자가 비칠 것이요,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시 아사녀의 기다림은 기약없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끝내 스님이 말했던 연못에는 탑 그림자가 비치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에 기력을 다한 아사녀는 결국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연못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뒤늦게 아내의 소식을 듣고 그 연못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아내를 만날 수는 없었다. 이때 연못이 있는 앞산 바위에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내의 얼굴은 인자한 부처의 얼굴로 보이기도 했다. 아사달은 그 바위에 아내의 모습을 새겨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 아사달이 어떻게 살았는지 전해지지 않으나 사람들은 아사녀가 몸을 던진 연못을 '영지'라 불렀고 끝내 그림자를 보여주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고 불렀다.
권력과 외세의 억압을 그렇게도 모질게 이기며 살아온 이 땅의 아사달과 아사녀는 4.19혁명과 3.1운동의 피끓는 투쟁으로 비로소 하늘을 보았다. 아니 이 땅의 아사달, 아사녀에게 드디어 하늘이 열렸다. 또 다시 쓰러지고 또 다시 헤어져도 아사달과 아사녀의 충천한 자유에의 의지는 억겁을 두고 샘물처럼 솟구쳐 오르리라. 신동엽을 민족시인이라 부르는 것은 그가 보여준 이 땅의 민중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사달 아사녀 설화에서 보았듯이 이 연인의 아픔은 헤어짐과 만남에의 갈망이다. 시인은 통제와 억압의 시대를 떨쳐 일어나려는 민중들의 열망이 남과 북의 하나됨으로 완성되리라 믿었던 것일게다. 실제로 4.19혁명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 타도와 함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등장하기도 했다. 분단 고착화를 통해 정권 연장을 꾀하려는 권위주의 정부의 속셈을 민중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일까. 4.19혁명은 민중들의 민주화 열망이 일시에 분출되는 동시에 새로운 통일 논의의 시작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 이 구호는 반공법 위반으로 많은 이들이 탄압받는 원인이기도 했다. 단지 북쪽의 구호와 같다는 이유만으로. 최근 법원은 1960년대 당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가 북한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에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판단을 해 당시 피고인들은 무려 50년만에 무죄를 인정받았다.
필자는 지나친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민족주의는 또 다른 사회 반목의 원인이 된다. 특히 요즘처럼 다문화 사회가 급속히 확장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편협함은 차별의 또 다른 이름이 되기 쉽상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잣대로 시인이 살았던 당시를 재단할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고전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은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를 재조명함으로써 보다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통일도 단순히 민족적 관점이 아닌 사람과 인권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통일의 당위성은 무슨무슨 거창한 이론을 동원하지 않고도 헤어지면 만나는 인지상정의 문제다. 한민족만의 염원이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상생과 인권의 문제인 것이다. 이 시대의 아사달과 아사녀는 피부색과 언어와 문화를 뛰어넘어 자연과 생태를 포함한 우주적인 개념이 돼야한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마지막 꿈. 애틋한 사랑이 영글어갈 공간. 기다리기에는 지칠 기운마저 다 소진해버린 간절한 꿈. 혈연과 지연의 고전적 '우리'가 아닌 우주적 개념의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꿈을 시인은 그렇게도 목놓아 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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