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사기사님네께/신동엽(1930년~1969년)
한 천년 졸아나보시지요
일제히 고개들을 끄덕대며
무슨 싸롱이라든가에 들어앉아
별들이 왜 별입니까
그것은 땅덩이지요.
아 그 유명한 설계사 피카소씨라시죠
아니, 저, 뭣이냐 그 입체파 가수들이라시던가요.
멋쟁이시던데요
새파란 제자들을 대장처럼 데리구 앉아.
농사나 지시면 한 백석직은.
품도 한창 아쉴 땐데.
염체 좋은 사람들
그래, 멀쩡한 정신들 가지구서
병신 노릇 하기가 그렇게나 장한가요
마음껏 흉물 쓰구
뒤나 자주 드나드시죠
양식은, 피땀 흘려 철마다 꼭 꼭 보내올릴께요.
뽕먹는 누에처럼 그 괴상한 소리나 부지런히 뽑아서 몸에 자꾸 감아보세요 「어떻게 되나」
참 훌륭도 하시던데요
어쩌면 그렇게도 꼭 같을까
미국사람을 참 훌륭히도 닮으셨어
조끔만 더 있으면 우리말 같은 건…….
「원체 일등국언자는 양반언자이니깐요 한 단어라도 많이 나열할수록 유식해요」
까다로운 정신님네들
무슨 어휘들이 그리도 풍부하오
위대한 예술은 민중이 알아들어선
못써요?
고만들 두시지요
아양 오용님네들
교활한 작업을랑 그만들 두시구
재주들이 있거든 細金術이나 배우시지
가다 맥히니깐 엉뚱한 사잇길로 도망가 앉으셔서
「정신이상증이시라면 몰라도요」
미래파요, 글쎄요, 실존이요
하 참 현대파이시라지요
아니 新直物主義시라던가
오 참 기계주의 인상파 인도주의시라지요
영업간판들이 푸짐도 하신데요
고추장 먹걸랑 순진들 해지세요
그리고 땅들이나 파시지요
어때요.
하, 그 현대지성인의 고뇌 말씀이죠
주제넘으신 것 같으신데요
아드님이나 키우시지.
싫으시거든, 그럼, 고개들 맞대고 끄덕끄덕 한 천년 졸아나보실까?
「英子碑石 밑에들 모시구 앉아서」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아니 굳이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국민들에게 영어조기학습과 원어민 발음을 강조하며 '어뢴지' 했던 어느 여대 총장님. 같은 과일에 된장을 바르면 '오렌지'가 되고, 버터를 바르면 '어뢴지'가 되니 가히 유전학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발언이었다. "영어 하나만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고등학교만 나와도 생활영어 못하는 사람이 없게 만들자"며 대놓고 사교육을 부추긴데는 미국사람으로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운명이 그렇게도 못마땅했을까. 하기야 '어뢴지'를 정권인수위원장으로 임명한 대통령도 첫 정상회담이랍시고 바다 건너 가서는 미국 대통령 운전수 노릇을 자처했으니 참 잘 어울리는 그 밥에 그 나물이었으리라. 시인이 살아있다면 이들을 향해 뭐라 그랬을까.
고추장 먹걸랑 순진들 해지세요
가방끈 좀 길다 싶은 님네들 입만 열며 줄줄 새어나오는 풍부한 어휘력, 그들만의 언어 앞에 끄덕끄덕 졸고 있는 민중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질세라 이길세라 경쟁 붙은 꼴이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보이스 피싱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천년 만년 졸아보지 않고는 모를 민중들의 따분함. 그 따분함이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현실을 알기나 할까. 지식 좀 많다고 지성인이라 자부하는 님네들, 지식도 예술도 같이 좀 나누면 안될까요.
그저 머리 속에 든 것 좀 많은 지식인일뿐인 자칭 지성인은 시인의 표현대로 '말의 사기사님'이 아니고 뭐겠는가. 역사란 '말의 사기사님'과 밀려오는 졸음을 참아내려는 민중들의 밀고 밀리는 투쟁의 연속은 아닐런지. 천박한 사대주의를 마치 지성의 본질인양 말의 향연을 즐기는 '말의 사기사님'들. 시인의 촌철살인은 통쾌함을 넘어선다.
고개들 맞대고 끄덕끄덕 한 천년 졸아나보실까?
「英子碑石 밑에들 모시구 앉아서」
고용율 70%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대통령의 말에서 시인이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고용율 70%'를 전면에 배치하는 걸로 봐서 순진한 국민들이 비현실적인 '시간제 일자리' 대신 '고용율 70%를 달성하기 위해'라는 표현에만 속아 넘어가주길 바라는 작정한 발언은 아니었을까. 민중들이 '말의 사기사님네'들이 펼치는 말의 향연에 더이상 졸고 있지도, 졸고만 있을 수도 없을만큼 절박한 삶에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알고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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