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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가난한 아내의 좌충우돌 중산층으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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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타임을 위하여/이선/1991년

 

한 때 '된장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된장녀란 미국식 소비주의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소비를 일삼는 여성을 비꼬는 온라인상의 은어였다. 밥 대신 커피를 마시고, 월급의 대부분을 명품가방 구매하는 데 지출하고, 드라마 속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등 자기 능력 이상의 소비 행태를 보이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이런 여성과 똑같은 남성을 일컬은 '된장남'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된장녀, 된장남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사회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점이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복판이었다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겠지만 어쨌든 아메리카노니 모카니 라떼니 하는 낯선 커피 용어들은 어느덧 일상어가 되었고,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백이 특정계층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당시 된장녀들이 자주 출입한다고 해서 '별다방'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던 스타벅스가 본점이 있는 미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문을 닫는 상황이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나라에서만은 급속한 시세확장을 이어가면서 유일하게 돈벌이가 되는 곳은 한국밖에 없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스타벅스의 성공과 함께 기존에 몇몇 부유층 밀집지대에서만 성행하던 다국적 커피 전문점들이 전국의 길거리로 진출하게 됐고, 국내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들도 우후죽순 생겨나면서 조금이라도 상권이 형성된 지역이라면 그야말로 한 집 건너 커피 마시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직장 은퇴자들에게도 최고의 창업 아이템이 되었으니 커피 전문점은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고 있다. 하지만 점심보다 비싼 커피를 즐기는 요즘 세태를 그저 유행이니 트렌드니 하는 말로 정당화하기에는 그 속에 감춰진 우리사회의 진짜 얼굴은 비루하기 짝이 없다.

 

 

나와 아내, 우리 가족의 새 보금자리가 된 서울특별시의 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면 누구든지 쉽게 은행나무를 볼 수 있다. 얼핏 봐서는 은행나무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지만 가까이 가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수종은 은행나뭇과이고 이름도 은행나무라고 적혀있는 이름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촌 아파트' 겠거니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행촌 아파트는 '은행나무 마을'이 아니라 '행복한 마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내는 행촌 아파트를 행복한 마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대체 아내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라구? 열서너 평짜리 아파트 단지라면 몰라. 사십 평짜리 한 동에 삼십일 평짜리가 두 동, 거기에 스물다섯 평짜리 한 동이 들어서 있는 서울특별시 아파트 단지라구. 그러니 그렇게 촌스러운 이름은 어울리지가 않는다구…… 그러나 은행나무가 있는 마을이 아니라 행복한 마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도 등기 권리증을 꼼꼼히 읽어보고서야 알았으니까. 아무튼 행복한 마을이라는 이름은 내 마음에 썩 들었다. 볼품없는 시멘트 건물뿐인 동네에 걸맞지는 않지만, 건설 회사 이름을 그대로 붙인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이름이다. 아내도 처음엔 나와 같은 생각을 했다. -<티타임을 위하여> 중에서-

 

이선의 소설 <티타임을 위하여>는 <행촌 아파트>라는 연작소설 중 일부다. 저자는 아파트라는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교육 문제, 집단 이기주의 문제, 계층간 위화감 등을 열두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티타임을 위하여>로 도시 중산층의 일상적인 풍속과 그들과 동화되려는 즉 중산층에 편입되기 위한 어느 가난한 아내의 이야기를 희화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무슨무슨 이유로 서울특별시에 있는 행촌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부부, 서울 그것도 중형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것만으로도 신분상승의 꿈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아내는 벌써 행촌 아파트의 '행복한 마을'이라는 의미에 고개를 흔든다. 아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사건의 발단은 옆집 여자의 '티타임' 제안으로부터 시작된다.

 

-13호 여자가 찾아와서 뭐랬는지 아세요? 글쎄, 티타임을 갖재요. 정말 멋있죠? 

 

티타임이 주는 세련된(?) 어감 때문일까. 아내는 그 날 이후로 이 세련된 사람들 집단에 편입하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정을 붙이고 살았던 이웃들을 한 순간에 '그쪽 사람들'로 표현하고 만다. 아내는 중산층이 모여사는 '이쪽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되기 위해 좌충우돌 스스로 변화를 시도한다. 아내의 변화는 이웃과의 수준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었고 그 과정은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그러나 좌절이라는 그 반전의 순간은 뜻하지 않는 곳에서 일어나고 만다.

 

한편 주인공 부부가 행촌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그리고 입주해서 벌어진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사회의 씁쓸한 풍속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시골에서 살려는 어머니와 미국 이민을 계획중인 큰형, 아이의 8학군 배정 때문에 시골로 이사할 수 없다는 둘째형이 옥신각신 하던 끝에 아내는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자청하고 나섰고 큰형은 그 대신 자기가 살던 집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라고 제안한다. 골이 난 어머니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 집을 막내 이름으로 해주라고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주인공 '나'와 아내는 뜻하지 않게 서울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어머니는 당신 몸 건사하기 어려울 때나 구박하지 말고 데리고 살아달라며 다시 시골로 내려간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고집대로 떡을 세 말이나 해서 3동 한 층 열네 세대에 떡접시를 돌리지만 반응은 시큰둥하다.

 

하기는 세 말이 아니라 세 가마니의 떡을 할 뻔했었다. 어머니는 이사 가게 된 행촌 아파트의 3동이 210세대가 된다는 말을 듣고 처음엔 그럴 작정을 했는지도 모른다. 상당히 고민을 하신 끝에 어머니는 과감하게 숫자를 줄였다. 우리 집이 있는 5층과 위아래 층인 3층, 6층 그리고 경비원, 청소부, 이삿짐센터 일꾼들, 친척들……그렇게 축소해서 어림잡은 떡이 세 말이었다. 나나 아내가 아파트 생활을 해본 적이 있었다면 훨씬 더 줄였을지 모르지만, 우리도 난생 처음 아파트 생활을 하게 된 것이므로 어머니의 계산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다. -<티타임을 위하여> 중에서-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이제 나, 아니 아내는 중산층 시민이 되었고 이에 걸맞는 수준으로 삶의 질을 끌어올려야 하는 것은 아내의 목표다. 그런 와중에 티타임 제안이 들어왔으니 아내에게 보이는 우리집이라곤 순전히 수준이 떨어지는, 중산층의 격에 맞지 않는 것들 뿐이다. 아내는 '나'의 벌이와 상관없이 집안 물건들을 하나 둘씩 바꿔가기 시작한다. 이 아파트 사람들의 격에 맞는 세련됨으로.

 

 

분명히 티타임이라고 했어요. 역시 수준이 다른 동네죠? 사실 그쪽 사람들은 말이죠. 한집안처럼 들락거려서 좋기도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바람에 곤란한 적이 많았다구요. 도대체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생각들을 안 했다구요. 그런데 이쪽은 티타임을 갖자고 하더라구요.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교양 있게 이웃사람들을 사귀나 봐요. 외국 영화에서 보면 티타임을 하자고 손님을 초대하고 모두 시간 맞추어서 오잖아요. 어머나……그런데 걱정이네요. 멀쩡하게 짝이 맞춰진 찻잔 하나 없으니 말예요. -<티타임을 위하여> 중에서-

 

찻잔을 바꾸고, 아기자기한 꽃무늬가 박혀있는 소라색 커튼과 식탁보를 새로 준비하고 금도금 숟가락을 엿 개나 사들이고 칠이 벗겨진 칠기 쟁반 대신 울긋불긋한 꽃무늬로 얼룩진 멜라민 쟁반도 한 세트 사들였다. 내친김에 칠기 다과상까지 사들였지만 티타임을 제안한 13호 여자는 감감 무소식이다. 13호 여자의 건망증이겠거니 생각하며 아내의 변화는 도대체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난데없이 자몽을 식탁에 올리고 급기야 밤마다 식구들에게 티타임에 멋지게 곁였을였을 간식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습관처럼 고약한 것이 있을까. '나'도 어느덧 아내의 밤참 시간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그게 누구 작품이더라.

-뭐가요?

-가짜 목걸이를 잃어버리고 진짜 목걸이를 갚아주느라 평생을 망친 여자 이야긴데.

-글쎄요. 나도 읽은 기억이 나는데

-오 헨리던가. 입센이던가.

-아, 생각났어요. 모파상이에요. 모파상의 <목걸이>라구요. 틀림없어요.

-그렇군. 모파상이군.

-그런데 갑자기 왜 모파상을……

-그냥…과분한 밤참을 얻어먹자니 황송해서…… -<티타임을 위하여> 중에서-

 

아내의 티타임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아니 13호 여자와의 설레었던 만남이 이루어지고서 억울하고 부끄럽고 쓸쓸하고 참담한 기분으로 변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세요? 글쎄, 13호 여자가 떡 접시를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는 거예요. 나한테 먹어도 되느냐고 묻지도 않고 덥석 떡을 집더라니까요. 그것도 손으로 말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떡은 이렇게 손으로 먹어야 제 맛이 난다나요. 그리고 티타임은 그만 두고 떡 잔치나 하자고 하질 않겠어요. 그래서 정신없이 냉동실 안에서 떡을 꺼내 찜통에 쪄 냈죠. 동치미를 몇 그릇이나 해치웠게요. 얼마나 신이 나던지……" -<티타임을 위하여> 중에서-

 

저자가 옆집 여자의 티타임 제안에 좌충우돌 아내의 변화와 좌절을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은 다름아닌 현대인의 끝없는 욕망이다. 닫힌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평수가 그대로 서열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그들의 삶 속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은 현대인의 허영과 허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라 하겠다. 이런 과정에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사라져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사회의 이런 변화가 단순히 개인들의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큰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해야 하고, 백수라도 자동차는 있어야 하고,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보다 명품백 하나 가지는 게 더 큰 가치가 되어버린 요즘. 현실이기도 하지만 미디어 속 판타지를 흉내내려는 집단 최면 증상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골치 아픈 현실은 그게 내 문제라 할지라도 애써 외면하는 것 말이다. 가상의 욕망을 쫓다 정작 놓치는 건 사람사는 세상의 본질이다. 욕망은 손에 잡히지 않을수록 더 흉칙한 괴물이 되어가는 법이다. 근처에 행복도시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교육 프리미엄이 사라질까 걱정한다는 서울 어느 아파트 단지 주민들에 관한 뉴스를 보면서 티타임을 향한 욕망이 금세 사라지지 않을, 우리사회의 영원불변한 트렌드가 될지도 모른다는 절망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티타임 때문에 아내가 내린 '행복한 마을'에 대한 새로운 뜻풀이는 중산층에 편입하려는 아내의 허영이나 허세보다 더 무리한 욕망인지도 모른다. 

 

마을이라면 우선 뒷산이 있고 앞 시내가 흘러야겠죠. 그리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처마 낮은 집들과 드문드문 보이는 토담과 텃밭을 앞세운 고샅도 있어야죠. 시내를 건너면 포플러나무를 양쪽으로 세우고 신작로가 늘어져야 하고, 마을 어귀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서 있는 널찍한 공터가 있어야죠. 그리고 그곳엔 사람들이 있어야 해요. 어디 그곳뿐인가요? 우물가에도, 밭이랑에도, 논두렁에도, 고샅에도, 마당에도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구요. 결코 혼자가 아닌 사람들이 들어가고서야 마을이 되는 거라구요. 사람들 없이는 마을을 만들 수가 없거든요. -<티타임을 위하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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