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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희망은 절망의 생채기에 돋아나는 새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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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무늬영원/한 강/2003년

 

한 대학생이 조지아주 브룬스윅행 버스에서 수년간의 교도소 복역을 마치고 아내가 있는 자신의 옛집으로 가던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는 아내가 자신을 받아줄지 고민하던 중 교도소에서 아내에게 미리 출소 날짜를 알려주고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준다면 집 앞의 참나무에 노란색 손수건을 걸어달라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아내가 자신을 받아주길 간절히 원했지만 선택은 아내의 몫이었다. 버스가 자신의 옛집에 가까워오자 그 남자는 가슴이 떨려 볼 수 없었던지 그 대학생에게 참나무에 손수건이 걸려있는지 봐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승객들도 가슴을 조이며 차창 너머로 마을 입구를 바라보았는데, 그 남자가 말했던 참나무에는 노란색 손수건이 한가득 매어져 있었다고 한다.

 

뉴욕 포스트의 칼럼에 게재되었던 실제 이야기로 Tony Orlandor가 1973년 발표해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이 노래의 가사로 인해 노란 리본은 용서와 환영, 희망을 상징하는 색이 되었다. 필자의 손전화기에도 Abba 노래를 빼면 유일하게 Tony Orlando의 이 노래가 담겨져 있다. 우울하고 울적할 때면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를 무한반복해서 듣곤 한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흐르는 노란색 리본을 떠올리면 정체모를 의욕이 샘솟기도 한다. 노래로도 치유가 가능하다는 말이 음악가의 근거없는 자기과시만은 아니지 싶다. 

 

노랑무늬영원. 언어에서 풍기는 아름다움과 달리 노랑무늬영원은 도마뱀이다. 도마뱀을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이 있다면 서운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노랑무늬영원과 도마뱀은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 같다. 노랑무늬영원이 도마뱀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한강의 소설 <노랑무늬영원>이 대충 이런 주제겠거니 짐작이라도 했을텐데, 이 생소한 단어 앞에서 노랑무늬영원의 실체가 밝혀지는 페이지까지 소설의 줄거리보다는 이 낯선 단어의 정체에 더 골몰했다. 끝까지 읽으면 어련히 알게 될 것을……

 

 

수메르 신화에 두무지와 인안나라는 신이 등장한다. 둘은 부부 사이다. 어느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내인 인안나가 저승 세계로 끌려간다. 저승 세계에는 불변의 법칙이 있다. 절대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단 저승으로 들어간 신을 대신할 이승의 신이 있다면 예외다. 인안나가 저승으로 들어간 이후 지상의 신들은 저마다 인안나를 구출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지만 단 한 명의 신 남편 두무지만은 무사태평이다. 화가 난 인안나는 자신을 대신할 신으로 두무지를 지목한다. 이를 알게 된 두무지는 지상과 천상의 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두무지는 용케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니 신들은 두무지를 도마뱀으로 변신시켰던 것이다. 꼬리 하나쯤 잘려도 금새 새살이 돋아나니 탁월한 변신술임에 틀림없다. 저자는 도마뱀의 이런 특성과 '노랑'이라는 색이 주는 상징을 떠올렸나보다. 절묘하게도 '노랑무늬영원'이라는  학명을 가진 도마뱀이 실제로 있었다니 단순한 우연의 일치는 아니었으리라.

 

저자는 <노랑무늬영원>의 주인공 '나'를 끝없는 절망 속으로 침잠시킨다. 급기야 이년전 교통사고로 왼손을 못쓰게 된다. 선택의 여지는 없다. 남은 오른손. 그러나 적절히 분업할 수 없는 손은 급기야 남은 오른손마저 기능을 잃고 만다. 그보다 더한 상황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무슨 대수겠는가 싶지만 '나'는 화가다. 화가에게 두 손의 기능이 정지됐다는 것은 깊은 절망의 늪 속에서도 맨 밑바닥을 허우적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 심각한 것은 이제 '나'는 한  남자의 골칫덩어리가 됐다는 것이고 남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경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마치 '나'를 감싸고 있는 물과, 물이 담긴 커다란 유리벽 바깥에 그가 서 있는 것처럼. 과학을 몰라도 서로의 모습이 굴절되어 보인다는 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상식이다. 교통사고 전 천천히 세월에 지워지고 싶어 널빤지 위에 그렸던 '나'의 얼굴은 이년 전의 그런 소박한 소망을 보여주지 못한다.

 

나는 이런 것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 오른손이 과연 아물 수 있을지, 작업을 다시 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다시 그린다면 나는 이런 고요 대신 울부짖고 싶다.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발을 구르고 싶다. 이를 악물로 동맥을 끊어, 솟구치는 피를 보고 싶다. 이 그림의 놀라운 고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느낌으로 고여 있는 평화가 나를 구역질나게 한다. 이 평화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오히려 죽음 같은 공허, 황무지의 참혹함-그것이 나에게는 진실로 느껴진다.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그리고는 통증을 참아가며 오른손을 뻗어 그 낡은 널빤지를 뒤집어버린다. 누구나 한번쯤 절망에 빠져봤을 것이다. 지금 절망 속을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통과 절망은 신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지만 절망 속에 빠져있는 사람에게 그 말이 위로가 될 것인가. 오히려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어항 밖의 굴절된 그것이다. 신에 가까운 절제력을 갖지 않는 이상. 그렇다면 스스로건 타인에 의해서건 절망과 고통에 내몰린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정녕 절망의 끝은 절망이란 말인가. 주인공 '나'를 깨운 것은 Q라는 어느 노화가가 수백 개의 점을 찍어 그린 그림과 친구 아들 녀석이 노랑무늬영원이라고 우겨대는 도마뱀이다. 비로소 '나'는 현재의 나, 물로 둘려싸여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림과 도마뱀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노랑이 '나'를 조금씩 조금씩 일으켜 세우기 시작한다. 아니 그저 물속을 허우적댈 뿐 수면 위로 떠오를 방법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나는, 그릴 수 없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존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이 그림이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 외에 다른 것이 되어보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나는 원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의지력이 없으며 미성숙한 인간이었지만, 그림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를 끌고 다녔다. 만병통치약처럼, 모든 인간적 약점의 처방으로서 그림은 나를 살렸다. 거짓, 나태함, 자기 중심성, 비굴한, 천박함으로부터 나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그것을 포기했을 때, 나는 곧장 낮은 지점, 가장 동물적인 지점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먹고 배설하고 잠을 자는, 본능만으로 남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구부정한 허리에 이가 남지 않은 입, 깊은 주름과 잔주름이 빈 데없이 빽빽한 백발의 노파(Q)가 마주한 화폭을 덮고 있는 노랑의 무수한 빛과 그저 이름이 예뻐서 노랑무늬영원이라고 어깃장을 놓고 있는 아이의 도마뱀의 잘려나간 앞발 자국 위로 원래 있어야 할 발보다 조그맣고 연약한, 투명한 흰빛의 두 발이 돋아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주인공 '나'가 느끼는 변화는 흐릿하지만 시나브로 보이기 시작하는 삶에의 열정이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

 

이렇게 더 작아져간다. 더 지워지고 뭉개진다. 다만 이상한 것은, 모든 것이 뭉개지는 데 비례하여 오히려 감각들은 선명하게 살아난다는 것이다. 회칼처럼 예리해진, 예전에는 가져본 적 없었던 눈과 귀와 코와 피부와 혀의 감각들을 느낀다. 그리고 그보다 명징한,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육체에서라고도, 영혼에서라고도 할 수 없는, 그것들이 분리될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뻗어나온, 무섭도록 절실한 촉수를 느낀다.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나'의 변화는 구십삼 세에 죽은 Q가 생전에 했던 인터뷰 기사 중에서 노랑에 대한 설명 부분을 읽으며 더 구체화된다. 희망은 절망과 맞닥뜨려야만 한다는 것을. 저자는 절망으로 침잠하던 '나'에게 극적인 반전을 선물하지는 않는다. 그저 '나'를 인정하고 인식할 뿐이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이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에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던져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그것을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올려지려면……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노랑무늬영원> 중에서-

 

사라진 피부에 새살이 돋는 것은 도마뱀뿐은 아니다. 사람의 상처난 피부도 언젠가는 아물고 그 자리를 새살이 덮는다. 그렇다고 그냥 방치해서는 안된다. 상처난 부분을 깨끗이 씻어내고 외부의 오염물질이 침투하지 않도록 소독도 해주고 붕대도 감아줘야 한다. 이렇게 해주지 않으면 짓무르고 곪기 마련이다. 희망은 절망의 생채기에 돋아나는 새살이다.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판도라의 상자 맨 밑에 남아있던 것이 희망인지 절망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치열하다고 한다. 필자 생각으로는 희망이지 싶다. 절망만 남고 희망이 상자를 튀어나와 인간 세상에서 떠돌고 있다면 이보다 무미건조한 삶이 있을까. 역사의 진보는 판도라 상자를 나와 인간의 삶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절망과의 투쟁의 역사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희망을 끄집어내기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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