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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소년체전 축구 예선전,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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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눈이신/성석제/2003년

 

달구벌 대구에서는 오는 5월25일부터 28일까지 4일간 제42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열린다. 한때 스포츠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해서 문제가 되던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정작 엘리트 체육에 밀려 생활체육으로써의 스포츠가 냉대받는 현실이고 보면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질 정도다. 필자와 동갑내기이니 꿈나무들의 제전인 소년체전도 이름에 걸맞지 않게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필자에게 소년체전은 아주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스포츠 행사이기도 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매 1982년 제1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운동에는 잼뱅이인 필자가 소년체전에 참가했을 리는 없고 도대체 1982년 그해 필자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어찌어찌해서 친구 녀석 둘이 소년체전 수영 군예선에 참가하게 됐다. 내가 어떻게 동행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섬이다보니 바다며 저수지며 여름철 놀이라곤 물놀이가 전부였으니 나름 섬마을에서는 난다긴다 하는 친구들이었나보다. 예선전은 수영장이 있는 도시에서 열렸는데 태어나 처음으로 섬을 벗어나봤으니 젯밥에만 관심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수영 예선이 열리는 날 알몸으로 바다며 저수지며 쏘다니던 친구 둘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수영복이 어색했을 법도 하다. 자유형이었는지 평형이었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두 친구는 출발 신호와 함께 멋지게 입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정식으로 배웠는지 옆 레인 친구들의 멋진 자세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물살을 갈랐다. 문제는 결승점을 앞두고 일어났다. 응원석이 갑자기 웃음바다가 된 것이었다. 중간 순위 정도로 결승점을 향해 달리던 한 친구 녀석이 힘이 빠졌는지 갑자기 정식 수영종목에는 없는 개헤엄(?)으로 결승점을 터치한 것이었다. 수영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개헤엄이 보기에는 영 폼이 안나지만 얼마나 쉽고 편안한지. 예선 탈락에 웃음거리가 되긴 했지만 인솔 선생님은 잘 했다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친구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꼴찌면 어떻고 개헤엄이면 어떠냐. 덕분에 처음으로 도시 구경을 했으니 본전은 뽑은 셈이었다.

 

이대 팔 예상을 뒤집은 낙상의 똥볼

 

 

필자의 장황한 에피소드가 재미 없었다면 앞으로 펼쳐질 소년체전 이야기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그것이 이 시대 대표적인 이야기꾼 성석제의 것이라면 귀가 솔깃해질 독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성석제의 소설 <저녁의 눈이신>은 양로원에 모인 칠십을 넘긴 노인들이 소년체육대회에 얽힌 에피소드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그려진다. 성석제다운 웃음과 풍자는 독자의 시선을 뺏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야기는 1972년 5월 16일 오후 3시 18분, 대한민국 양산도 낙양군 낙양읍 낙상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축구 경기의 첫 골에 대해 그 누구도 말을 하지 못한 채 입만 벌리고 있는 상황에서 시작한다. 제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낙양읍 선발전 중앙국민학교와 낙상국민학교의 대결에서 예상을 깨고 낙상국민학교가 첫 골을 넣은 이 사건은 '공은 둥글다'는 의외성 많은 축구를 설명하기에는 애시당초 대결 자체가 불가능한 경기였다. 20년 전통의 중앙국민학교 축구부와 겨우 축구반을 만든 오합지졸 낙상국민학교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중앙국민학교에 대한 모독에 가깝다.

 

텔레비전이라도 중계라도 했으면 어떻게 그 같은 골이 가능했는지 되풀이해서 보여줄 수도 있으련만 때는 1972년 5월이며 장소는 대한민국의 전형적인 농촌 소도시 낙양읍의 초등학교 운동장이었으니 텔레비전 중계를 할 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텔레비전으로 상황을 다시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어떤 영상 기록매체도 동원되지 않았다. 하다못해 카메라를 가지고 온 사람도 없었다. 이 경기의 결과가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또한 기념할 만한 것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념사진 찍을 생각을 한 사람도 없었다.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뻔한 결과가 예상됐고 중앙국민학교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경기가 진행됐지만 좀처럼 골은 터지지 않았다. 낙상국민학교에는 송구(핸드볼)선수 출신 자일이 골기퍼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킥이 서툴러 공 차는 일은 오로지 풀백에게만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손으로 잡고 손으로 던지기만 했던 자일이지만 그의 손은 그야말로 거미손이었다. 아마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이운재 선수 정도는 됐나보다. 이날 경기는 저자의 말대로 1972년 9월 서울에서 열린 뮌헨 올림픽 아시아 지역 예선 말레이시아와의 결정전에서 서른두 번의 슛을 난사했음에도 고질적인 골 결정력 부족으로 단 한 골도 얻지 못하고 말레이시아의 단 한 번의 헤딩슛을 허용한 것이 결승골로 연결됨으로써 치명적인 1패를 안아 예선에 탈락하게 된 대한민국 대표팀을 보는 듯 했다.  

 

"완전히 '이팔 게임'이었다. 낙상이 전후반 이십 분씩 사십 분 다 합쳐서 중앙선을 넘은 게 딱 두 번이었다. 한 번은 후반 들어서 진영이 바뀌면서 넘은 거다. 그리고 딱 한 번 전반 후반에 중앙선을 넘었는데……"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중앙국민학교 입장에서는 사단이 난 것이었다. 풀백 팔래의 똥볼이 중앙 수비수 등에 맞고 세비 앞으로 굴렀고 세비한테서 공을 받은 유세는 깜짝 놀라서 아무 데로나 찬 것이 중앙 수비수를 맞고 비오 앞 넓은 공간에 떨어졌다. 중앙 수비수의 실수가 이어지면서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유세의 발 바로 앞에 공이 굴러왔다. 낙상 축구부 중 유일하게 정식 축구화를 신은 유세의 발 끝에서 벼락과 같은 강슛이 작렬했다. 공은 중앙 골키퍼의 주먹에 맞아 튀면서 크로스바 중심을 맞히고 마치 자석처럼 세비를 향해 날아들었다. 세비는 본능적으로 마른 가슴을 내밀어 공을 맞았다. 그게 다였다. 세비의 도드라진 가슴뼈를 맞은 공이 중앙 골키퍼가 손쓸 새도 없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만 것이다. 골. 골이었다.

 

흑백 영화는 돌아가고

 

 

소설의 또 다른 재미는 마치 영사기를 돌리듯 당시 시대상황, 스포츠에 얽힌 에피소드를 풀어내는 저자의 입담이다. 가상의 지명 양산도 낙양군 낙양읍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네 개의 국민학교가 있었으니 일교일기의 교육부 방침으로 각 학교마다 하나의 교기를 운영하고 있었다. 낙양은 야구, 낙산은 브라스밴드, 중앙은 축구, 낙상은 여자배구. 특히 낙상에서 어떻게 여자 배구가 학교를 대표하는 교기가 되었는지 특별한 이유를 발견하기는 어려웠지만 남학생들에게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1972년 전후에 한국을 빛낸 여자 스포츠, 가령 여자 농구, 여자 배구, 여자 탁구가 어째서 남자의 그것들보다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는지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려운 것처럼. 어쨌든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낙상의 여자 배구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도 대회에서 일약 준결승까지 진출함으로써 낙양 스포츠사의 전설이 되었다. 초중고 스포츠는 물론 성인 스포츠 전 부문을 통틀어.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때마침 낙상국민학교에 송구(핸드볼)가 주특기였던 송상구 선생님이 전근을 와 반별로 송구팀을 만들고 특별활동에도 송구반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후 낙상국민학교 체육시간은 남자들은 송구만 하고 여학생들은 배구인지 피구인지 아무튼 각자의 운동만 했다. 일 년 넘게 송구 바람이 불어 특별활동 송구반이 학교 대표 송구부로 승격되려는 순간 송 선생님이 여자 기계체조를 지도하던 이매애 선생님하고 그렇고 그런 일이 있어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버렸다. 결국 송구부의 꿈은 무너졌고 이 때 송구를 했던 친구들이 제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낙양군 축구 예선전에 출전한 낙상국민학교 축구반이었다. 이 중 자일은 전국에서도 통할 정도의 송구 골키퍼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읍내 4개교와 읍내 외곽 4개교가 공문을 받은 제1회 전국소년체육대회 낙양군 축구 예선전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읍내 외곽에서 온 국민학교 축구부는 마지막 버스가 끊어지기 전에 돌아갈 수 있도록 경기를 빨리 끝내달라고 부탁하는가 하면, 버스를 처음 타본 아이들이 멀미를 심하게 해서 경기를 포기하기도 했다. 또 읍내에 있는 낙양과 낙산은 자신들의 교기에 대한 자존심 때문이라며 참가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낙양군의 초등학교 여자 배구 대표 선발전은 무기권, 무추첨, 무대전으로 낙상의 여자 배구 대표팀이 선발되었고 야구 역시 '삼무'의 요식행위를 거쳐 대표가 되었다. 중앙의 축구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중앙의 축구도 요식행위가 있든 없든 대표가 될 게 틀림없었다. 그건 기권으로 점철된 지리멸렬한 준준결승이 보여주는 바였다. 그런데 20년 전통의 중앙에 대항하는 팀이 나타난 것이었으니. 그게 바로 낙상의 축구반, 아니 축구부였다.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승부차기, 그 통한의 패배

 


세비의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골을 먹은 중앙 선수들은 자존심 때문인지 눈물까지 흘렸다. 중앙 운동장이 축구경기를 할만큼 크지 않아 낙상국민학교에서 예선전이 벌어졌는데 낙상 선수들은 손님을 불러다 놓고 결례를 한 것 같아 한없이 미안했고 민망했다. 문제는 후반에 발생했다. 심판이 경기에 개입하고 나섰다. 그것도 중앙에 일방적으로. 참 심판은 낙양고등학교 체육교사로 럭비 선수 출신이었다. 

 

후반이 시작되자 심판은 낙상의 공격수가 공을 잡기만 하면 호각을 불어댔다. 반면에 중앙의 공격수가 공을 잡으면 골라인 아웃이 되거나 그 공이 낙상의 천재적인 골키퍼의 손에 들어가기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호각을 불지 않았다. 심판의 이런 편파판정에도 송구 골키퍼 출신 자일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거미손 자일의 방어를 뚫은 것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다.

 

자일은 그 공을, 송구를 할 때처럼 근처에 있는 수비수에게 던져주려고 했는데 맨발의 팔래가 어디서 배운 영어인지는 몰라도 "마이 볼!" 이라고 하면서 자신이 차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자일은 팔래가 차기 좋게 공을 골라인 선상에 놓았다. 팔래는 골대 가까이 물러났다가 절뚝거리며 공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가 비호처럼 중앙의 센터 포워드 덕수가 달려들었다. 미처 팔래의 발이 닿기도 전 덕수의 축구화 오른편 인프런트에 공이 닿으며 그토록 철벽과 같은 자일의 왼쪽을 뚫고 골네트에 공이 걸렸다.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골인"을 외치는 심판. 경기 내내 심판은 중앙의 응원단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중앙의 열화와 같은 공격이 퍼부어졌지만 자일의 선방으로 결국 1대1로 경기는 끝났다. 그런데 심판은 전후반 각각 십 분의 연장전을 생략하고 승부차기로 결판을 짓겠다고 했다. 낙상 선수들에게 승부차기는 처음 들어본 축구 용어였다.

 

승부차기는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야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식으로 채택한 제도였으니 이 심판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심판은 타임머신으로 미래의 세계에 다녀오기라도 한 사람처럼, 두 팀의 주장에게 승부차기를 할 선수를 다섯 명씩 고르라고 재촉했고 결국 낙상에서는 2-3-5 포메이션의 5에 해당하는 다섯 명의 선수가 앞으로 나섰다.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애시당초 승부차기의 결과는 뻔했다. 급조된 낙상 선수들과 전통의 중앙 선수들은 그게 성인의 11미터든 초등학교 경기의 9미터든 상대가 안되는 게임이었다. 게다가 낙상 선수들의 킥은 중앙 골기퍼에게 모두 읽히고 말았다.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는 낙상국민학교 운동장. 낙상국민학교 골대는 부족한 그물 때문에 오른쪽은 비닐로 잇대어 있었다. 그래서 낙상 선수들은 왼쪽으로만 차는 습관이 있었다. 네트를 뚫고 나간 공을 주워오는 수고를 손님들에게 시킬까 두려워한 듯. 그러나 낙상에는 천재 골키퍼 자일이 있었다. 중앙 선수들은 정식 축구화로 빵빵 찼지만 번번히 자일의 손에 막히고 말았다. 놀랍게도 네 명이 찼을 때까지 스코어는 1대1 이었다. 어이없게도 승부는 유능한(?) 심판에 의해 결정되고 말았다.

 

식용은 공 바로 앞에서 속이는 몸짓을 한 뒤에 슛을 했다. 자일이 몸을 날렸다. 그러나 공은 크게 골문 밖으로 빗나갔다. 그런데 심판은 다시 공을 차도록 지시했다. 자일이 먼저 몸을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1982년, 아니 2002년 월드컵의 규정과는 달리 승부차기에서 골키퍼는 미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자일은 공이 크로스바 아래의 골라인을 통과할 때까지 세 번이나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고 서 있어야 했다. -<저녁이 눈이신> 중에서-

 

경기는 2대1로 끝났다. 승부차기 규정이야 어찌 되었건 경기 내내 중앙에 편파적이었던 심판 탓에 낙상 선수들은 승리를 빼앗긴 것만 같았다.

 

저녁의 눈이신

 


소설을 읽는 내내 제목인 '저녁의 눈이신'이 무슨 말일까 궁금했다. 저녁에 내리는 눈[雪]이란 말인지 그렇다면 배경이 5월인데 상황적으로 전혀 맞지 않고 그렇다고 주어와 동사를 따져봐도 답이 안 나오고, 해결의 실마리는 소설 마지막에서야 풀리기 시작한다.

 

만장산 모퉁이를 도는 세비의 눈앞에 문득 샛별이 떠올랐다. 세비는 샛별이 하늘의 눈처럼 빛난다고 느꼈다. 그날 하늘의 눈과 그 눈빛은 유난히 맑고 고왔다. 샛별을 바라보던 세비는 문득 자신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깨달았다. 세비는 목이 메어 고개를 숙였다. 공에 부딪친 가슴이 뻐근해지면서 뭔지 모르게 서럽고 분했다.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저자 성석제의 입담이 빛을 발한 이유는 단순히 재미있게 풀어가는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웃음 속에 들어있는 풍자와 세태를 촌철살인하는 은유가 있어서다. '저녁의 눈이신'은 '샛별이 눈처럼 빛난다'는 의미와 함께 '샛별이 눈이 부시다'라는 의미일게다. 심판은 바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상징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둠이 깔리는 저녁처럼.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약자의 몫이라는 메세지일 것이다. 눈처럼 빛나는, 눈이 부신 샛별은 암울한 시대를 버텨내는 희망일 것이다.

 

세비는 고개를 들었다. 세비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저 별빛을 평생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세비 자신이 넣었던 그 골처럼 샛별도 하나였다. 그로부터 그의 칠십 평생 동안 언제나 샛별은 맑고 고왔다. 그가 뭔지 모르게 세상 속에 있는 게 서럽고 억울한 저녁,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언제나. -<저녁의 눈이신> 중에서-

 

한편 소설은 양로원에 모인 세비를 비롯한 칠십 노인들의 얘기인데 소설이 발표된 시점을 따져봐도 제대로 된 계산이 안나온다. 1972년에 초등학생이었으니 소설 속 칠십 대의 설정이 맞으려면 최소한 2030년은 돼야 한다. 어쩌면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권력의 속성이 쉽게 변하지 않을 거라는 절망적 상황을 설정하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을까. 1972년과 2013년의 기나긴 시차에도 불구하고 그 본질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권력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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