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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대동세상의 꿈으로 승화한 어느 노시인의 제망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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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각의 <부용산>/1998년

 

“이 노래만 들으면 양심수 석방과 광주학살 진상 규명, 남북 올림픽 공동 개최를 주장하며 1988년 명동성당에서 투신한 제자 조성만 열사가 떠오른다” -<한겨레, 2012 415일자 기사 중에서>

 

강정마을 지킴이 문정현 신부가 가장 좋아한다는 이 노래, 안치환의 호소력 짙은 애달픈 목소리로 들으면 가슴 한 켠이 짠해지는 이 노래. 평생 70여 편의 시를 썼으면서도 변변한 시집 한 권 내지 못한 노시인 박기동의 시 부용산이다.

 

부용산 오 리 길에/잔디만 푸르러 푸르러/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너는 가고 말았구나/피어나지 못한 채/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박기동의 시 부용산중에서-

 

누군가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어딘가 처연하게 들리는 이 시와 노래를 통해 먼저 간 제자를 떠올린다는 노(老)신부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니지 싶은 것은 노구의 몸을 이끌고 평화의 섬 제주를 지키려는 그의 열정 속에서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꿈과 열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성각의 소설 <부용산>을 통해 강정마을을 둘러싼 철조망을 뜯어내기 위해 스폰지처럼 가벼워진 노구를 이끌고 국가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는 문정현 신부가 꿈꾸는 세상을 보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제목에서 보듯 최성각의 소설 <부용산>은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이 모티브다. 주인공 '나'는 농심마니 모임에서 노처녀 한의대생 은미가 불렀던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주는 처연함에 반해 집요하리만큼 이 노래의 내력을 추적해간다. 게다가 '부용산'의 처연함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용산'은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려졌던 노래였다.

 

소설 <부용산>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한다면 전 한겨레 논설위원 김종철, 한국일보 김성우, 송영 시인, 작가 김지하, 황석영 등 실명이 등장하고, 노래 '부용산'의 내력 또한 한국일보 '김성우 에세이'를 토대로 한 팩트라는 점이다. 운동권에서 불려지기 전에 이미 남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구전되어 불려졌다는 '부용산'의 내력을 간단히 옮기자면 이렇다.

 

작자미상이었던 '부용산'의 저자가 박기동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두 개의 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목포설'이다. 해방 직후 목포의 항도여중(현 목포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박기동이 경성사범에 합격했으나 광복으로 인해 고향에 내려와 항도여중에 전학한 김희정이라는 학생이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자 제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가사를 썼고 이 학교 음악 교사였던 안성현이 곡을 붙인 노래가 '부용산'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애제자설'이라고도 한단다. 그렇다면 왜 '부용산'은 남도 사람들 사이에서 구전으로만 전해내려왔던 것일까. 동요 '엄마야 누아야'의 작곡자이기도 했던 안성현은 월북 무용가인 최승희의 남편이자 무용가였던 안막의 조카였다고 한다. 안성현 또한 6.25때 월북해서 북한의 국립교향악단 단장을 지내기도 했다니 '부용산' 작곡자의 정체가 숨어버린 까닭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부용산' 내력의 또 하나는 '벌교설'이다. 우선 작사자 박기동이 벌교 사람이고 벌교에 부용산이 실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추적된 내력이다. 박기동에게는 박영애라는 누이동생이 있었는데 30세때 순천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당시 벌교상업중학교 교사였던 박기동은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 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썼다. 이후 목포 항도여중으로 초빙된 박기동은 여기서 제자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고 안성현이 박기동의 시작 노트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곡을 붙였다는 것이다. 일명 '제망매가설'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상성이 전혀 없는 이 노래가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면서 금지곡이 되었다는 것이다. '벌교설'은 작사자 박기동 본인의 토로이니 '부용산' 내력의 정설이 확실할 게다.  

 

개인의 슬픔을 담은 서정성 짙은 노래가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금지곡이 되어버린 한국 현대사의 왜곡된 단면이 노래 '부용산'에 투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저자는 '부용산'의 '애제자설'과 '제망매가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이런저런 설을 떠나 당연히 불러져야 할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평범한 성정을 박기동 시인의 제자인 경기대 김효자 교수의 말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부용산」의 고향이 어디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 50년 만에 살릴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부용산> 중에서-

 

보다 더 의미심장한 저자의 주제의식은 노처녀 한의대생 은미가 알게 된 내력에 있다. 은미의 아버지는 빨치산이었다. 북이 버리고 남이 저주한 빨치산들에게 노래 '부용산'이 불려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전향이라는 원죄의식 품고 살았던 은미 아버지의 시집에서 발견된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전투는 없을까"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저자는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을 대신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부르고 싶고 또 불려져야 할 노래가 음지로 숨어야만 했던 역사에 대한 분노이자 더불어 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노래를 '부용산'을 통해서 본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빨치산들이 불렀다고 해서 입에서 절로 나오는 노랠 못 부르게 해? 차라리 숨을 못 쉬게 하는 게 낫지."

"그러니까 빨치산들이 않았던 소나무 그늘에 앉거나 빨치산들이 쳐다보던 구름도 보면 안 된다니깐. 그 사람들이 바라보던 노을도 물론이고, 그게 다 죄가 된다니까..." -<부용산> 중에서-

 

한편 저자가 말하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은 비단 사람끼리의 그것에 머물지 않고 좀 더 우주적 의미로 확대된다. 소설의 배경이 된 농심마니 모임은 산삼을 심는 사람들의 문화운동으로 산삼의 묘삼을 산에 심되 심은 자가 캐 먹지는 않는다는 이타적인 정신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즉 이타심으로 어우러진 더불어 사는 세상은 자연과 환경, 생태를 포함한 그것이 되야 한다는 저자의 믿음이지 싶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음지에서만 불려졌던 '부용산'은 비로소 '은미 부용산'과 '김 선배 부용산'과 '우리들 부용산'이 막 뒤섞여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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