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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아이의 눈에 비친 산업화의 어둡고 긴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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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남의 <노새 두 마리>/1974년

여기 집나간 두 마리의 노새가 있다. 한 마리는 암탕나귀와 수말의 교배에서 태어난 실제 노새다. 이 녀석은 아버지의 연탄 마차를 끄는데 어느날 비탈길 돌부리에 바퀴가 걸려 마차가 되집어지는 틈을 타 냅다 도망쳐 버린 놈이다.

우리를 버리고 간 노새. 그는 매일매일 그 무거운, 그 시커먼 연탄을 끄는 일이 지겹고 지겨워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아 영 떠나가버렸는가. -<노새 두 마리> 중에서-

또 한 마리는? 연탄 마차의 주인이자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착한 우리 아버지다. 노새가 우리를 버리고 간 며칠 후 이 놈의 노새가 온동네를 휘젓고 다녔던 바람에 아버지는 도로 무슨 법이니 하며 으름장을 놓는 경찰을 따라 집을 나갔다.

"이제부터는 내가 노새다. 이제부터 내가 노새가 되어야지 별수 있니? 그놈이 도망쳤으니까. 이제 내가 노새가 되는 거지." …중략… 나는 "아버지" 하고 뒤를 따랐으나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고 어두운 골목길을 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또 한 마리의 노새가 집을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노새 두 마리> 중에서-

최일남의 소설 <노새 두 마리>는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비루한 삶을 통해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이름으로 도시 빈민이 된 1970년대 민초들의 삶을 실제 노새와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 현실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거부할 수 없었던 개발과 성장의 시대, 누구는 그 덕에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되었다고 우상화 작업까지 마다하지 않지만 국가의 주도하에 아니면 권력의 비호 아래 성장의 단맛은 소수에게 집중되었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의 단초를 마련했던 것도 사실이다. 빛과 그림자는 공존한다는 진리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시간을 초월해 지워지지 않고 있다.

주인공 '나'의 눈에는 왜 아버지가 노새로 비춰졌을까. 연탄 마차는 노새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닐 수도 있다. 노새는 연탄 마차가 뒤집어지는 순간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향해 도망치고 말았다. 그렇다면 노새는 그런 자기의 꿈을 이루었을까. 시장을 헤집고 자동차가 윙윙 거리는 도로를 질주하며 결국 고속도로까지 도망쳤던 노새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어쩌면 노새는 끝없는 질주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아버지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단한 삶은 노새의 질주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분명 '나'의 눈에 비친 개발의 바람 즉 변두리에 새도시가 들어서면서 매일매일 근근히 연탄 몇 장씩을 팔아가며 생계를 꾸리고 있는 아버지에게는 내색할 수 없는 빛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고단한 삶이 종지부를 찍고 새 희망으로 새 보금자리를 꾸릴 수 있었을까. 소설은 그렇지 못했던 시대적 상황을 노새의 도망으로 자신이 노새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체념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 아버지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지도 않고 으름장부터 놓고보는 경찰은 민초들의 비루한 삶을 헤아리지 않았던 권위주의 정부의 상징처럼 보인다.

소설은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이인 '나'는 아버지의 동선을 따라다니며 본 세상을 솔직담백하게 그려낸다. 물론 아이가 현재 아버지의 고된 삶이 산업화라는 개발과 성장의 소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리 없다. 저자가 아이를 관찰자로 설정한 이유는 다른 데 있을 것이다. 꾸밈없고 순수한, 세상을 눈에 비친 그대로 말하는 아이를 통해 민초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거짓없이 보여주는 것으로 국가 주도의 근대화와 산업화가 드리운 그림자를 고발하려 했을 것이다. 구동네와 새동네로 분리되면서 생긴 차별과 소외 그리고 성장의 열매를 결코 공유하지 못할 것 같은 민초들의 삶.

아, 우리 같은 노새는 어차피 이렇게 비행기가 붕붕거리고, 헬리콥터가 앵앵거리고, 자동차가 빵빵거리고, 자전거가 쌩쌩거리는 대처에서는 발붙이기 어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새 두 마리> 중에서-

최근 어느 신문을 보니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직장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한편 '스스로 행복한가'라는 질문에 의외로 최빈국으로 평가받는 국민들이 행복지수가 높게 나온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결과를 볼 때 문명의 이기와 행복은 결코 정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조사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 분배의 문제가 나오지싶다. 수십년 간 국가 주도로 이어져온 성장과 개발 과정에서 분배라는 개념은 빠져 있었다. 소수에게 집중된 성장과 개발의 이익은 소외계층을 만들고 소위 중산층이라는 시민들에게도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현실적인 팍팍함 말고도 개발과 성장의 이익이 골고루 분배되지 않는 우리사회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성장이 분배'라는 희한한 논리가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분배나 평등을 말하면 '복지 포퓰리즘'으로 폄하되기까지 한다. 이미 전세계적으로 실패한 정책으로 판명난 신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하면서 진행되고 있는 성장 위주의 정책은 서민들의 삶의 질을 담보하지도 못할 뿐더러 상대적 박탈감만을 더욱 키우는 형국으로 치닫고 있다. 여전히 토건국가를 지향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 시대에 늘어나는 것은 소설 속 노새들 뿐이라는 착잡한 심정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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