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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우리는 지금 대화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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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의 <잔설>/2011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찾아왔다. 선량이 되기 위해 각 후보 진영은 그야말로 사활을 건 유세전에 돌입했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과거처럼 대규모 군중 집회 대신 TV 토론이 선거의 새 문화로 자리잡았고 거리를 가득 메웠던 후보와 운동원들의 확성기 소리도 사라졌다. 유권자들도 일상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고 심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다. 오히려 냉담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게 선거라지만 그 선택마저도 선거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실망으로 변해버리니 정치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예나 지금이나 선거는 []의 향연이다. 새로운 선거문화를 보여주겠다던 어느 젊은 후보는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자 정치공세라며 되레 큰소리를 치고, 박사 학위 논문이 표절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후보는 인용일 뿐 자신의 논문은 창조적이라고 변명한다. 과거 막말이 논란이 되어 사퇴 요구가 빗발쳐도 사과는 할지언정 후보 사퇴는 없다고 버티기도 한다. 갖가지 이유로 TV 토론을 거부하기도 하고 토론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후보도 있다. 심지어 특정 정당의 대표로 TV토론에 참석했던 사람은 성의없는 답변으로 입방아에 오르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에게 토론문화는 생소한 경험이지 싶다. 어차피 이기기 위한 게임이 선거이다 보니 대화보다는 그게 진실이건 거짓이건 일방적인 말잔치가 변하지 않는 선거의 풍속도일지도 모르겠다. 말, 말, 말...말이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말의 상대가 있어야 하고 양쪽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 쏟아지는 말들은 온통 죽은 언어들뿐이다. 

 

이시백의 소설 <잔설>을 읽다보면 우리사회의 소통이나 대화가 고대 그리스 아고라(Agora)만도 못한 불통과 단절의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비판하거나 이해하기 전에 우선 '낙인찍기'로 상대를 제압하려는 죽은 언어로 가득 찬 우리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하기야 12년의 기나긴 교육 기간을 시험문제 풀이에만 올인했으니 대화나 토론이 낯설고 어색한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잔설>은 이런 우리의 못된 문화를 현재와 과거를 오버랩시키는 방법으로 꼬집고 있다. 우선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위트 넘치는 표현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늘님도 넉가래를 배에 디고 밀다가 덜커덕 돌부리에 걸려 '악!' 소리도 못 내고 눈물이 핑 돌아보셔야 땅바닥에 엎드려 지내는 인간들 사정을 헤아리려나.

 

그 통에 몇 남지 않은 잎을 매달고 겨우내 가랑거리던 졸참나무에 얹혀 젖은 깃을 털어대던 박새한마리가 오두방정을 떨며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짓까불며 날아다녔다. -<잔설> 중에서-

 

<잔설>은 어느 시골 마을의 이장 선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대립과 반목을 다루고 있다. 과반수 득표라는 선거 형식을 두고 대립이 시작되지만 그 이면에는 4대강 사업을 둘러싼 반목이 자리잡고 있다. 서로의 주장에 대해 대화를 통한 소통보다는 나와 의견이 다르면 말로써 상대를 가장 극한의 나락으로 낙인찍어 버리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그러는 거기는 워째서 저 살겠다구 멀쩡히 흐르는 강을 파헤치는디 앞장서는겨? 거기서 금싸라기래두 떨어지는 게 있는가벼."

"있구 말구. 아, 거기서 흙 파는 중기 운전사덜 사먹는 밥이며, 심심허니 피워대는 담배값만 혀두 워디루 떨어지간디."

"그러문 거기 엎드려 살던 모래무지는 죽어두 되구."

"모래무지가 대수여? 사람부텀 살구 봐야지."

"모래무지가 죽으믄 사람두 죽는 벱여, 알구나 떠들어."

"돈이 있는디 워째 죽는다?"

"강을 막으면 그 물이 썩어 암것두 살 수 없는 거 몰라? 암만 돈이 있으면 뭘 혀."

"돈만 있음 죽은 이두 살려내는 시상여. 강 썩으믄 서울 가서 살믄 되지?"

"거기두 썩으믄?"

"그럼 미국 가서 살지."

 

고작 이 정도의 대화로 서로는 상대방에게 '빨갱이'와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찍어 버린다. '나라에서 하는 일마다 반대부터 하는 건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느니,  '제 호주머니에 공돈 얻자고 동니 사람들 등쳐먹는 것은 빨갱이보다 더한 사기꾼'이라고 말이다.

 

소설 첫 부분에 마을회관에 모인 노인들의 연평도 포격 사건에 관한 잡담도 대화가 단절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삽입된 장치로 보인다. 저자의 시선은 남북의 이념대립보다 이념대립을 부추기고 있는 그래서 대화에 소극적인 현정부의 대북정책에 맞춰져 있다. 4대강 사업이 국론분열을 초래한 원인도 바로 대화단절, 소통의 부재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잔설(殘雪)은 어떤 의미일까. 서로에게 빨갱이와 사기꾼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기고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해 버린 이장 후보들을 보면서 주인공은 과거 자신이 빨치산 토벌대가 되어 무고한 아니 빨갱이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사람들을 학살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말 한마디면 죽지 않아도 될 사람. 평생을 가슴에 담아둘 기억이지만 그 학살의 현장은 죽은 영혼들이 잔설이 되어 시퍼렇게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편협한 이념에 전도된 말[言]의 살인인 것이다. 잔설은 주인공의 자기반성이자 대화를 거부한 채 낙인찍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사회가 맞닥뜨리게 될 불행한 미래인 것이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4대강 사업이나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관한 논란도 정부의 소통부재가 단초를 제공해 주었다. 수십조 원이 들어가는 국가사업을 여론의 합의보다 성과주의에 집착해 밀실에서 마치 속도전처럼 밀어부친 성과주의와 일방통행식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게다가 친정부 성향의 언론과 단체를 이용해 국가정책에 반대하면 '빨갱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편가르기에 열중하고 있으니 국가백년지대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선거를 며칠 앞두고 '민생'이니 '서민'이니 하는 말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듯이 손에 붕대를 감을 정도로 서민들과의 소통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상대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 민생과 서민을 외면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과연 선거가 끝나도 그들은 서민들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이들의 말이 선거철 잠깐 유행하는 이벤트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국민들과 소통하고 그 결과물은 정책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의 본질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반목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미없는 손 한 번 잡아주는 것보다 진정성있는 소통이고 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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