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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만나야하는 사람들의 조각난 퍼즐 맞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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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균영의 <어두운 기억의 저편>/1983년

술먹고 난 다음날 찾아온 두통과 갈증은 순간 술과의 종언을 고할만큼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헛개나무의 아세트알데히드 분해효소나 콩나물의 아스파라긴산도 광고효과로 인한 심리적 안정감을 줄 뿐 숙취의 고통을 완전히 털어낼 수는 없다. 인간은 간사하다. 그놈의 망각 때문이다. 망각은 고통의 기억을 순간의 희열에 무릎꿇게 한다. 알코올이 사라진 간(肝)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처럼 다시 술을 흡수할 공간을 만들어낸다. 언젠가 썩어문드러질 간을 걱정하는 것은 속좁은 남자의 핑계가 되기 일쑤다. 그러나 끊어진 필름만큼 고통스런 숙취는 없을 것이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기억, 쾌락과 고통 사이에 존재하는 그것은 자기상실이다. 아무리 꿰맞추려 해도 조각난 파편들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지 못한 채 어두운 기억 저편을 부유하고 만다. 

이균영의 소설 <어두운 기억의 저편>은 마치 추리소설 같기도 하고 퍼즐게임을 지켜보는 것처럼 긴장의 연속이다. 응원하는 관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인공의 퍼즐게임은 이어질듯 말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만나야 하지만 만날 수 없는 사람들, 만날 수 있지만 거대한 장벽에 마주선 사람들, 그들의 고통은 전쟁으로 말미암고 시간이 상처를 덧나게 했으며 박물관 구석에 처박힌 이데올로기로 인해 질병이 되고 만다. 

중소 무역회사 수입부 말단 사원인 그는 내고 서류 때문에 알게 된 은행 신대리와 술자리가 늘 그러하듯 2,3차를 옮겨다니며 술을 마시고는 이문동 어느 여관에서 아침을 맞는다. 필연적으로 찾아온 갈증과 두통, 그러나 이 고통은 신선한 공기만 호흡하면 되지만 그는 또 다른 고통에 직면해 있다. 회사가 부도날지도 모를 서류가 든 가방을 분실했고 게다가 끊어진 필름은 일요일의 여유가 악몽으로 바뀌고 만다. 소설은 주인공 그가 서류가방을 찾기위해 전날의 기억을 역추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조각난 퍼즐을 맞춰나가면서 그는 그동안 잊고 살았던 아픈 과거를 기억해 낸다.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서 그는 '이문동 박치과'라는 단어를 조합해 낸다. '이문동 박치과'에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그는 전쟁고아였다. 저자는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하는 여성과 아동을 통해 전쟁의 참상과 상흔을 전쟁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도 더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30년, 아니 60년이란 세월을 견뎌온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문동 박치과'는 피난 중에 죽은 어머니가 손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여동생 혜숙이 있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온전하지 못하다. 세살 적 기억일뿐더러 어머니가 죽던 날 옆에 있었던 여자 아이가 친동생이라는 것도 확실치가 않다. 혈육이라곤 없는 곳에서 그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어두운 기억의 저편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전쟁의 상흔을 더욱 비참하게 부각시킨다. 그가 서류가방을 찾아 전날의 기억을 더듬던 과정에서 만난 '밀밭'이라는 술집의 작부 미스민이다. 둘은 비슷한 경험이 있는 전쟁고아였다. 그는 어쩌면 미스민에게서 기억의 저편에 존재하는 여동생 혜숙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의 손은 뜨거웠으나 이미 여자의 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은 배려가 아니다. 당위다. <어두운 기억의 저편> 1983년 6월30일부터 장장 136일간 세계 방송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이산가족찾기 방송이 있은 후 발표된 소설이다. 당시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소설의 모티브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기억의 저편에서 존재했던 퍼즐들은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완성된 그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는 현실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비극이 되고 있다. 

데탕트의 시대, 그러나 여전히 냉전을 먹고사는 사람들과 냉전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생의 끝자락을 향해 달리고 있다. 만나는 데는 이유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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