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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감귤밭에 묻어두었던 그날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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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길언의 <우리들의 조부님>/1982년

바야흐로 철새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있다. 자연의 섭리에는 철새가 있고 텃새가 있다는데 어찌됐는지 선거철만 되면 출몰하는 이 새들은 텃새와 철새의 유전자를 동시에 갖고 있는 돌연변이 조류인듯 싶다. 권력의 달콤함이 그리 좋은건지 아니면 투철한 애민정신(?)의 실천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마다 이유있는 무덤들을 만들고 있는 꼴이 참 가관이다. 돌연변이 철새들의 향연이야 늘상 보던 풍경이지만 올해는 공천을 줬다뺐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게 그들도 이제 시민권력의 파워를 조금은 인식하고 있는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이번 4.11총선 공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의 감동공천이지 싶다. 천막당사로 위기를 벗어나더니 이번에는 20대의 젊은 직장인, 국가대표 운동선수, 피랍선박 선장, 연예인 등 유명인을 내세워 또 한번 이미지 정치에 화룡점정을 찍고 있다. 그러나 감동공천의 장막을 한꺼풀 벗겨보면 변할 수 없는 그들의 정체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만다. 서울 강남을 후보에 전략공천했다 여론의 반발에 취소한 이영조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제주 4·3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각각 'communist-led rebellion(공산주의자가 선동한 폭동)'과 'popular revolt(민중 반란)'으로 규정해 물의를 빚었다. 그는 논란이 일자 번역 과정에서의 왜곡이라며 다시 논문을 쓴다해도 똑같이 쓸 것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다. 그는 이승만의 반민특위 해체도 정당화하는 등 왜곡된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제주4·3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의 공식적인 영어 표현은 'Jeju 4·3 Uprising'과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라고 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좌파의 마녀사냥'이라고 항변한 이영조 공동대표나 전략공천했다 비난이 일자 돌연 공천을 취소해 버린 새누리당이나 역사의식이 천박하기는 도진개진이 아닐 수 없다. 

진실은 항상 구름 위에 숨어있는 태양과도 같다. 구름이 걷히면 태양은 언제든 지상을 향해 강렬한 햇빛을 내보낸다. 기나긴 장마가 지루할 뿐이다. 현길언의 소설 <우리들의 조부님>에서 묻어두었던 진실과 그 진실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기나긴 장마에 절망해 살아온 개인의 삶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들의 조부님>은 1980년대 바라본 1948년 4월3일 그날의 진실을 밝히는 소설이다. 다시 강산이 세 번 더 바뀐 오늘 바라본 그날의 진실이다. 

세상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일들이 수도없이 벌어진다. 소설은 그 중에서도 죽은 자의 영혼이 산 자의 몸에 옮겨붙는 현상인 '빙의'를 소재로 그날의 진실에 접근해 간다. 아버지가 죽은 후 외삼촌의 제안으로 시작한 감귤밭에 3대째 그날의 진실을 묻어두고 살았던 어느 가족사의 아픔은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의 괴상한 행동으로 들춰지고 만다. 사람들은 이제 그날의 진실을 맘놓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 마을 민보단(마을의 이익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이익단체) 부단장이었던 아버지는 그날 공비로 몰려 동네 청년 여덟 사람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그 죽음이 얼마나 억울했던지 아버지는 임종을 앞둔 할아버지에게 빙의되어 환생한다. 가족들과 동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행동을 그저 노인의 노망끼 정도밖에 인식하지 않는다. 아니 그러기 위해 애써 할아버지의 행동을 애써 괴상하게 바라볼 뿐이다.

아버지로 빙의된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죽음을 몰고온 장본인인 양 구장의 아들을 찾아간다. 양 구장의 아들 길수는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양 구장 죽음의 가해자로 아버지를 지목한 사람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길수를 데리고 그날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아버지의 억울함을 보여주고 길수에게 그날의 진실을 얘기해 줄 것을 호소한다. 그러나 길수는 여전히 말을 아끼고 있었고 친척들은 이런 할아버지의 행동을 불안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방 안에 모여 앉은 친족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폈다. 모두들 뭔가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그것은 할아버지 죽음에 대한 불안이기보다는 오히려 저 잠에서 할아버지가 다시 깨어나는 데 따른 불안이었다.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는 데 대한 불안이었다.

소설이 발표된 시점이 1982년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소설 속 이 표현은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얼마나 큰 내재적 고통이 뒤따르는지 알 수 있다. 제주4·3항쟁이 있은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권위주의 시대로 표현의 자유는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 앞에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아버지 죽음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꼭 약속한 일 같았다.'라는 소설 마지막 부분은 1980년대 당시의 시대적 분위를 대변해 주고 있다. 

현길언은 현기영과 함께 제주4·3항쟁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제주 출신의 문제작가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조부님>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 현길언의 관심사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뭔지도 모르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던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그림자에 갇혀살아왔던 개인들의 아픈 역사를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정보의 홍수라는 현대에도 이데올로기가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태반인데 60여 년 전이야 오죽했겠는가. 그저 살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는데 역사는 그런 개인들에게 색깔을 덧칠하는 방식으로 부관참시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았으리라. 그래서 '나의 조부님'이 아니라 '우리들의 조부님'인 것이다

저자의 이런 바램과 달리 아직도 세상을 권위주의 시대가 끼워준 색안경을 통해 보는 이들이 적지않다. 색안경을 벗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연색들이 섞여 만들어낸 아름다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말이다. 이데올로기는 사람사는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색칠하기 위한 도구일 뿐 그 자체로 목적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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