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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박원순 폭행녀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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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순태의 <유월제>/1982

                                                    

기억은 과거의 경험을 정신 속에 되살려내는 것이다. 기억은 인간의 이성과 결합할 때 문명의 이기를 창조하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기억은 학습에 의해 진화시키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과거의 기억은 현재와 미래의 희로애락을 결정하기도 한다. 특히 트라우마(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trauma)와 같이 되살아난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생활을 억압할 때 인간은 기억의 반대 의미인 망각을 적절히 활용하고 학습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과거의 아픈 기억을 하나쯤 안고 살아간다. 그 기억이 현재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트라우마와 같이 삶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문순태의 소설 <유월제>에서 점백이라는 어느 여인의 삶은 온통 과거의 아픈 기억에만머물러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자비하게 자행된 광기의 살인은 마치 흑백사진 속 추억이 되어 현재의 삶을 지배하고 한발짝도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족쇄가 되고 있다. 법적으로 따지자면 결코 살인자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녀 또한 추악한 역사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소설 <유월제>는 어느 여인의 망각할 수 없는 기억을 통해 한 개인의 삶을 처참하게 파괴해 버린 역사의 추악한 얼굴을 고발하고 있다. 결코 망각할 수 없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잊혀져야만 하는 역사이기도 한 셈이다.

 

광기의 씨앗

 

1950년의 기억은 32년 지난 1982년 남도시의 후미진 구석에 숨어사는 점백이라는 여인의 삶을 철저하게 지배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이 여인의 기구한 삶은 다시 30년이 지난 2012년에도 유령이 되어 한국사회를 떠돌고 있다. 최근 각종 집회와 장례식, 콘서트 현장을 드나들며 특정인을 향해 빨갱이라고 외쳐대는 어느 할머니의 삶은 또 다른 형태의 소설 속 점백이를 보는 듯 하다. 한국전쟁 이후 60년 동안 한국사회를 떠도는 유령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다. 전세계적인 탈냉전 무드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와도 같아 보인다. 문제는 역사와 국가가 조작한 범죄행위에 개인은 의도하지 않은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소설 <유월제> 6.25라는 이념전쟁의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다루고 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념전쟁이 남긴 살인의 광기에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이 씨앗으로 자라고 있음을 본다. 바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다. 부끄럽게도 여전히 진행형인 친일파 청산이 어떻게 광기의 씨앗이 되었을까.

 

소설 속 점백이 아버지 박장섭은 일제 강점기 운산면 면서기였다. 일제의 강제징용이 한창이던 시절 방울재 사람들이 왜경보다 더 무서워한 사람은 다름아닌 박장섭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마을 사람들의 집안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박장섭이 일제 앞잡이였다는 사실은 방울재 사람들이 강제 징용을 피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나서 방울재 사람들의 바램과는 달리 박장섭이 되레 부면장으로 승진하면서 불행한 역사의 씨앗이 되고 만 것이다.

 

이념이 뭔지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이어진 분단과 한국전쟁 중에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게 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점백이라는 여인이다. 일제 강점기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가족이 몰살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점백이는 인민군이 물러나고 국군이 점령한 방울재에서 또 다른 살인의 광기에 휘말리게 된다. 살인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것이다. 이념전쟁은 그렇게 마을 사람들을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재단해 버렸던 것이다.

 

속죄의식

 

소설 <유월제>에서 가장 상징적 의미로 등장하는 것은 업득이라는 입양아와 동물원 호랑이다. 방울재를 떠나 숨어살던 점백이가 세 번의 결혼 실패를 거듭하면서 병원에서조차 몇 달을 살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업득이를 17년 동안 키우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픈 과거 즉 피해자보다는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지우고자 하는 일종의 속죄의식이다. 어쩌면 그녀가 업득이를 기어코 살려내야만 하는 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으로부터 해방된 삶 망각의 자유를 가져다 주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때묻은 타월로 얼굴과 목덜미의 땀을 훔치고 나서 도둑놈 갈쿠리처럼 찐득찐득 달라붙는 햇살 속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눈부신 허공의 한복판에 열일곱 살이 되도록 제 힘으로 제 콧구멍의 코딱지 하나 못 떼고 등과 허리와 엉덩이에 공이가 박히도록 온종일 천정만 쳐다보고 반듯하게 누워있는, 누에처럼 창백하고 무기력한 아들 업득이의 햇살보다 몇 배나 더 따갑게 뇌리와 심장에 찍혀왔다. -<유월제> 중에서-

 

업득이를 살려내는 것이 아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그 방법은 그녀가 매일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있는 동물원 호랑이에게 있다. 호랑이 뼈를 갈아서 먹이면 업득이의 병이 낫는다는 말만 믿고 매일 동물원 입장권을 끊고 호랑이 우리 앞을 서성이며 어떻게 하면 호랑이를 죽일 수 있을까 생각하지만 실현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그녀가 평생 안고 살아야 할 숙명처럼 말이다. 결국 업득이의 죽음과 함께 그녀가 얻을 수 있는 망각의 기회는 사라져버린 듯 한다.

 

한편 고향 방울재에서는 매년 유월이 되면 전쟁 중에 이편 저편에서 죽임을 당한 수십 명의 마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해 주기 위해 진혼제가 열리고 있다. 망각이 아닌 아픈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점백이는 유월제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픈 과거를 치유하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다만 소설 처음과 끝에 점백이가 죽였다고 생각했던 바우 아저씨의 등장은 아픈 기억을 치유할 수 있는 단초의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앞서 언급했던 일명 박원순 폭행녀의 기사를 보면서 비난에 앞서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비상식적인 행동이 결코 그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 때문이다. 소설 <유월제>의 저자가 그의 다른 소설에서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비인간성과 몰가치성이 여전히 국가에 의해서 아니면 특정 단체에 의해서 조작되고 재생산되는 현실이 점백이라는 여인과 박원순 폭행녀의 기억을 과거에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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