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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잉여인간, 신자유주의가 부활시킨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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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의 <잉여인간>/1958년

중소기업은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다. 이런 아우성이 무색하게도 거리에는 실업자들로 넘쳐난다. 아침을 준비하듯 마지막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심에는 술에 취했는지 불빛에 취했는지 수많은 청춘들이 비틀거리는 네온사인 아래를 방황하고 있다. 방황하는 청춘들을 바라보는 사회와 국가의 시선은 차라리 냉소적이다. 편하고 깨끗한 일만 찾는다고 질타한다. 눈높이를 낮추라며 인자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전세계 어디를 봐도 이보다 더 획기적인이고 확실한(?) 실업대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만이고 직무유기다. 어디에도 국가의 책임은 없다.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동물적 울타리에 젊은  청춘들을 가둬놓은 국가는 책임 제로의 무모한 도전을 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에게 방황하는 청춘들은 잉여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복지는 어떤가. 국가 정책으로서의 복지는 사회 구성원들의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 책임과 의무에 대해 국가가 짊어져야만 하는 짐이다. 국민으로서 또는 시민으로서의 책임은 이미 과거형이 됐을 수도 있고 새롭게 펼쳐질 미래의 그것일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복지는 불편부당한 보편적인 개념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복지는 시혜로 대체되어야 할만큼 그것의 개념을 상실하고 있다. 

국가는 복지를 잉여인간들에게 내민 자비로운 은혜쯤으로 생각한다.

잉여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쓰고 난 후 남은 것'이다. 잉여에 인간이라는 단어를 결합시킨 잉여인간은 '남아도는 인간'쯤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잉여인간은 단순한 수학적 개념으로써의 초과가 아니라 무가치의 의미가 개입됨으로써 '쓸모없이 남아도는 인간'이 되고 만다.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할 수 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인간형이라고나 할까. 신자유주의는 강한 자만을 생존시키기 때문이다. 그 뿐인가. 강한 자에게는 국가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라는 덤이 주어진다. 결국 국가에게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 되고 만다. 

 

                      ▲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잉여인간의 출현은 필연적이다.   사진>한국경제

 잉여인간에 대한 어느 학자의 정의는 더욱 참담하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제레미 러프킨은 인류역사는 0.1%의 창의적 사람과 그를 알아보는 0.9%의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이끌어 왔으며, 나머지 99%는 잉여인간이라고 했다. 즉 다수의 국민들은 소수가 땀흘려 키워낸 열매를 그저 따먹기만 하는 수동적 인간이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속되는 한 제레미 러프킨의 잉여인간에 대한 정의는 좀 더 구체적으로 현실에 정착할지도 모른다. 

잉여인간이란 말이 최근에 생긴 단어는 아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 <아버지와 아들>의 작가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Ivan Sergeyevich Turgenev, 1818~1883)의 소설 <잉여인간의 일기>를 통해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전후 작가인 손창섭의 소설<잉여인간>을 통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소설 <잉여인간>은 작가 손창섭을 대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잉여인간>은 한국전쟁이라는 암울한 상황이 빚어낸 무기력한 인간형을 그려내고 있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국가의 방임 속에 생겨난 결코 문학적 가상의 인물이 아닌 현실 속에 방치된 새 인간형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보여주고자 한 잉여인간은 어떤 모습일까. 소설은 치과의사인 서만기의 치과 병원에 모인 죽마고우 친구들을 통해 잉여인간의 전형을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다른 소설에서도 그랬듯이 철저하게 관조적 입장에서 암울한 현실을 이 현실이 만들어낸 잉여인간의 모습들을 담담하게 보여 줄 뿐이다.

먼저 채익준은 비분강개형 인간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늘 쉽게 흥분한다. 그러나 자기의 생활에서는 무기력한 인간이다. 아내의 죽음도 모른 채 어디선가 현실에 대한 불만만 가득 안은 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인간형이다. 반면 천봉우는 채익준과는 달리 늘 실의에 빠져있다. 유일한 낙이라곤 매일 방문하는 서만기의 치과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얼굴만을 왠종일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주인공 서만기는 매력적인 외모만큼이나 가슴이 따뜻한 인간형이다. 병원 월세도 제대로 못내는 형편이면서도 채익준의 아내가 죽었을 때는 병원 건물 주인인 천봉우의 아내에게 돈을 빌려 장례까지 치뤄준다.

세 친구 중 누가 잉여인간인가에 대해서는 그리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소설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천봉우의 아내 인숙이다. 치과 병원의 건물주이기도 한 그녀는 물려받은 재력으로 인해 매사에 거리낌이 없다. 치과 의사인 서만기에게도 노골적으로 접근한다. 사실 천봉우와 인숙 사이에는 자식이 둘 있지만 출생의 비밀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인숙에게는 무능력한 천봉우가 남편으로서는 제격일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인물이 인숙이며 제레미 러프킨이 말한 1%의 인간이다.  

저자가 보여준 잉여인간의 전형은 결코 개인의 능력차가 아니다. 국가와 사회의 직무유기에 따른 암담한 현실이 잉태한 새로운 인간형이다. 결국 전쟁의 상흔으로 무기력하게 그려진 잉여인간은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폐기되지 않는 한 끊임없이 잉태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채익준과 천봉우만을 잉여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불합리한 시대를 홀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서만기마저도 또다른 형태의 잉여인간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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