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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일본어 소설을 썼지만 그는 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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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량의 <빛 속으로>/1939년

김사량은 1936년 도쿄제국대학 재학 시절 일제의 수탈을 그린 소설 <토성랑>을 일본어로 발표했다. 이 소설을 연극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려 구류처분을 받기도 했던 김사량은 이후 일본어로 쓴 소설을 계속 발표하면서 학도병 위문단원으로 파견되었다가 탈출해 조선의용군에 가담한 이후부터 우리말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이유로 한때 김사량은 친일문학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더욱이 그는 월북작가였고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 인민국 종군기자로 참여하기도 해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온몸으로 체험한 작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지금이야 작가 김사량을 민족주의자나 항일독립투사로 평가하고는 있지만 과거 수십년 동안 일본어 글쓰기 전력과 분단과 냉전이라는 한국적 특수한 상황은 그에 대한 평가를 인색하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저평가된 작가가 비단 김사량뿐이겠냐마는 변절한 작가들이 민족주의자로 둔갑해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도배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동안 정부 차원의 과거 청산과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얼마나 지지부진했고 얼마나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려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사량은 어떻게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 후보가 되었을까?

 

 김사량의 대표작 <빛 속으로>는 일본어로 쓰여진 소설이다. 또 일본의 권위있는 아쿠타카와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작품이다. 1939년 일본 문학잡지인 《文藝首都》에 '光の中に'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으니 <빛 속으로>는 번역소설인 셈이다. 그는 이 소설에서 조선인임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하루오라는 소년이 민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일본은 왜 하필 식민지 작가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은 소설을 그들의 최고 문학상 후보에 추천했을까 하는 것이다.

많은 문학상들이 순수한 문학적 성과만을 가지고 시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문학 외적인 요소 즉 시사성이나 작가의 현실참여 등 정치적인 요소 또한 문학성 선정에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1930년대 말 민족문화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했던 내선일체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시기 국내에서는 많은 순수문학이나 좌파문학 작가들이 친일로 변절하기도 한다. 

일본 제국주의는 소설 <빛 속으로>를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지인(일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일본사회에 동화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로 해석했을 수도 있고 그들의 내선일체 정책에 그럴듯한 명분을 제공해 주는 소설로 인식했을 수도 있다. 다분히 일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해석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빛 속으로> 뿐만 아니라 김사량의 다른 소설들과 그의 행적을 볼 때 그가 일제의 생각대로 친일문학인이 아니었음은 물론 오히려 민족주의자요 항일 투사였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김사량에게 일본어 소설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적 자각과 식민지 민중의 피폐한 삶을 알릴 수 있는 도구였을 것이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고 임종국 선생은 1966년 광복절에 발표한 '친일문학론'에서 김사량의 소설에 대해 설익은 시국적 설교도 없고 어릿광대같은 일본에 대한 선전도 보이지 않는다며 일본어로 쓰이고 친일잡지에 게재됐다고 해서 그의 소설들을 친일작품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혼혈소년 하루오, 그의 아버지 한베에 그리고 미나미

 

그렇다면 김사량은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학생들에게 '남'이라는 조선 성 대신 '미나미'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는 주인공 나는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뚜렷한 자각없이 아이들에게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미나미'라는 일본 이름에 대해 별 의미없이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러던 중 늘 괴팍한 행동만 일삼는 야마다 하루오라는 소년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자각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또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하루오의 아버지 한베에라는 인물이다. 한베에는 조선인 아내에 대한 폭력을 일삼고 아들인 하루오는 어머니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들이 이처럼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하루오와 한베에 모두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혼혈인이 받는 차별을 강한 자기부정을 통해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인 아내를, 조선인 어머니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들이 일본인이 될 수 있을까? 자신들의 몸 속에 섞인 조선인 피를 부정하면 할수록 그들은 일본인이 되기는커녕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깊은 나락으로 빠지게 되고 비정상적인 행동만을 유발하게 된다. 해답은 딱 하나, 그들이 자신들의 몸 속에 지니고 있는 조선인의 피와 일본인의 피를 모두 인정하는 것 뿐이다.

구제불능 상태에까지 이른 한베에와 달리 아직 아이인 하루오에게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주인공 나는 하루오와 어머니와의 관계회복을 통해 하루오의 정체성을 찾아주려 하고 나 또한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된다. 무용수가 꿈인 하루오가 무대 위에서 받는 조명으로 형상화된 '빛'은 하루오의 조선적 정체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나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기도 하다. 

살펴본 것처럼 작가 김사량은 비록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일본어로 소설을 썼지만 그는 분명 민족주의자였다. 또 그는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항일투사였다. 김사량의 민족주의적 항일투사의 면모는 그의 또다른 일본어 소설 <태백산맥>이나 우리말로 쓴 <노마만리> 등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름다운 우리말로 조선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고도 버젓이 아이들의 교과서를 차지하고 있는 문학인들,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우려 했고 몸소 항일운동에 뛰어들었으나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월북작가라는 이유로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던 김사량. 66주년 광복절 아침 과연 진정한 역사의 주인공은 누구여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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