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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한국대표단편소설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탐욕스런 인간들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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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1908~1996)의 <추산당과 곁사람들>/「문장」19호(1940.10)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 중에 팔정도(八正道)라는 것이 있다.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르게 생활하고(正命), 바르게 정진하고(正精進), 바르게 깨어있고(正念), 바르게 집중하면(正定) 누구나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실천 덕목이다. 그러나 여지껏 부처가 된  사람을 보지 못했으니 보통 사람으로서는 말처럼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성인의 그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정신과 육체에 지니고 있는 욕심 때문이지 싶다.

죽음을 목전에 둔 추산당은 한 때 수행하는 승려였다. 아니 지금도 승려로서 속세와의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추산당은 수행 승려라고 믿기에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재산이 있고 애첩 묘련도 있다. 그는 고행하는 승려라가보다 양 볼에 욕심이 주렁주렁 매달린 추한 늙은이에 더 가깝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추산당과 곁사람들>은 탐욕스런 인간 군상에 대한 고발이다.

소설을 이해하기에 앞서 요산 김정한(1908~1996)을 간략히 소개한다면 행동하는 지식인, 지성인이란 본디 이래야 한다는 행동하는 양심이 전형을 보는 듯 하다. 진보적인 문학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초대 의장이기도 했던 김정한은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운동을, 해방 후에는 군부독재의 서슬퍼런 총칼에 맞선 대표적인 지성인 중의 한 명이다. 이런 이력 때문인지 김정한의 소설들에서는 무한한 신뢰와 함께 진정성이 느껴진다. 눈으로 보고도 보이지 않는다며 어줍잖은 필력으로 민중을 기만한 지식인이 모래알처럼 많은 세상이 아닌가!


저자가 <추산당과 곁사람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의 탐욕이다. 물욕 때문에 추해져버린 인간들이지만 죽음이라는 극한의 상황 앞에서도 멈출 수 없는 게 바로 인간의 욕심이다. 죽음을 앞둔 추산당을 둘러싼 곁사람들은 모두 슬퍼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을 들여다보면 추산당의 죽음을 즐기고 있다. 추산당의 죽음은 그들만의 향연을 더욱 빛내줄 멋진 음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건 으례 하는 소리겠고, 역시 재산 처분 문제가 그들의 흥미의 중심이었다. 아무개 집에는 논을 몇마지기 줄 것이라는 둥, 아무에겐 단 몇 마지기밖엔 안 줄 게라는 둥-그저 이따위 뒤넘스런 억측들이었다. -<추산당과 곁사람들> 중에서-

물론 죽음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전락시켜버린 원인은 추산당 본인에게 있었다. 승려였던 추산당은 팔정도는 커녕 부처 불자도 모르는 땡중이었다. 일하기 싫어 절로 들어갔고 '동냥 왔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십여 년 해서 재산을 모았던 것이다. 수행은 안중에도 없는 추산당이었기에 동냥질을 할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구박하고 업신여겼지만 이제는 추산당이 남기고 갈 재산에 마을 사람들은 절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추산당이 숨이 끊어진 뒤에도 토지대장을 꽉 붙들고 있는 장면이라든가 추산당 화장을 맡은 인부들이 추산당의 다 탄 두골에서 금니를 빼는 장면은 물욕 때문에 몰강스럽게 변해가는 추한 인간들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친족들은 상복(喪服) 때문에 서로에게 으르렁대고 유서 처분 문제로 한바탕 싸움이 벌어진다. 그나마 주인공 명호와 아버지 강첨지로 인해 추한 소설 속 세상이 어느 정도 정화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불교라는 종교적 배경은 인간 군상들의 탐욕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설정인 동시에 저자 김정한의 현실비판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역할도 한다. 일제 강점기 종교는 다분히 이중적 얼굴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몽과 독립의식을 일깨워 주는 등대의 역할 뿐만 아니라 가장 친일에 앞장선 조직이 종교단체였다는 점에서 수천년 동안 반도의 역사와 함께 한 불교는 김정한의 '어떻게 사느냐'라는 주제의식을 가장 확실하게 부각킬 수 있는 소재였을 것이다.

성인이 아닌 이상 인간에게서 욕심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 욕심은 자기발전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는 물질적 진보도 인간이 본디(?) 가지고 태어난 욕심의 성과라도 해도 빈말은 아니다. 그러나 욕심이 '물욕'이니 '탐욕'이니 하는 부정적 의미로 폄하되는 가장 큰 이유는 더불어 사는, 더불어 살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부산저축은행 사건처럼 말이다. 

'어떻게 사느냐'. 김정한의 소설 <추산당과 곁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다양한 해답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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