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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포스팅/북 리뷰

여성해방운동의 바이블이 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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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입센(Ibsen Henrik Johan, 1828~1906)<인형의 집>/1879년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나게 해 준 신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악랄한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의 말이 아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위대한 철학자요 사상가인 플라톤이 한 말이란다. 교과서만 달달 외우는 대한민국 교육 현실에서 플라톤의 이 말을 들어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설마 민주주의의 역사를 공부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플라톤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플라톤이 죽은 지 2,30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물질문명이든 정신문명이든 눈부실 정도로 발달했건만 플라톤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체제나 시스템이 존재할지 묻는다면 섣부른 결론일 수 있으나 플라톤의 한계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과학문명이 평범한 과학자의 우연한 실험에서 발전해 왔듯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과 사고의 진화도 우연찮은 계기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노르웨이 극작가인 헨리 입센의 [인형의 집]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입센이 페미니스트도 그렇다고 사회개혁가도 아니었으나 그의 짧은 희곡 한 편이 인류가 이 땅에 생겨난 이래로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되어 왔던 여성 차별에 대한 각성을 불러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입센의 [인형의 집]은 프랑스의 시몬느 보봐르가 쓴 [제2의 성]과 함께 20세 여성 운동사의 바이블이 되어왔다.

 


[인형의 집]이 1879년 출판되었으니까 100여년이 지난 지금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세계 도처에서 좁게는 우리 일상에서 여성은 굳이 성별을 구분해야 될 정도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형의 집]은 남자 주인공인 헬머의 여자 주인공이자 아내인 노라에 대한 사랑스런 대사로부터 시작한다.

“밖에서 재잘거리는 건 내 종달새인가?”

“거기서 내 다람쥐가 뛰어다니고 있는 건가?”  -<인형의 집> 중에서-

이 짧은 대사를 통해 당시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노라의 여성으로서의 각성이 시작되는 동기가 된다. 노라, 더 나아가 당시 여성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분위기는 동등한 인간으로서 또는 한 여성으로서의 존재가 아닌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인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노라 또한 인형 취급받는 삶을 당연시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었다. 남편의 속물 근성을 알기 전까지는..

노라의 남편인 헬머가 은행장에 취임하게 되면서 노라의 각성이 시작된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은 큰 병에 걸리게 되었고 치료비가 부족했던 노라는 고리대금업자인 크로구스타에게 돈을 빌리게 된다.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보증인이 필요했지만 노라의 친정 아버지도 임종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대신해서 서명하고 생활비를 아껴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었던 것이다.한편 헬머의 은행장 취임으로 해고 위협을 받고 있던 크로구스타는 보증서로 노라를 협박하게 되고 급기야 헬머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

“당신은 내 행복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내 장래를 망가뜨렸어...그것도 모두 무책임한 여자 때문이야!” -<인형의 집> 중에서-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의 명예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던 헬머는 이렇게 아내에게 쏘아붙였지만 잠시 후 노라의 친구인 린데 부인의 도움으로 문제가 해결되자 180도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게 된다.

“끝났다. 끝났어!...아아 귀여운 노라...당신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거지? 내가 당신을 용서했다는 것이…나에 대한 애정 때문에 당신이 그랬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인형의 집> 중에서- 

그러나 이 말은 노라가 자신이 아버지와 남편으로부터 한낱 인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 즉 자신은 죽어가고 있는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쳐 드리지 않을 권리도 죽어가는 남편의 목숨을 구해 줄 권리도 없었던 것이다.

노라는 뒤늦게 후회하는 헬머에게 자신이 원하는 기적의 말을 남기며 문을 나서게 된다.

“우리의 공동 생활이 진정한 결혼 생활이 된다면요. 그럼 잘 있어요.” -<인형의 집> 중에서-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부가 신설되었다. 신설될 당시에도 찬반 논란이 거셌고 현재도 여성부를 포비아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남성들이 많다. 사회와 생활 곳곳에서 여성차별이 여전하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노라의 가출은 100년 이상 진행형이다. 더 나아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지 않는 한 노라의 가출은 200년이 될 수도 있고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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